설령 꿈속에서 설렐 수 있을지언정 ー 우메츠 요이치 《폴리네이터》 전 와타리움 콘노 유키
우메츠 요이치가 하는 파프룸이라는 코뮌은 필자가 한국 지면에 몇 차례 소개한 바 있다.[1] 미술 교육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에서 출발해 2013년부터 활동을 전개한 이들은 도심에서 떨어진 가나가와 현 사가미하라의 작은 공간에서 미술가 지망생(현재는 ‘멤버’)을 중심으로 독보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개인 공간을 짧은 기간동안 전시장으로 꾸미거나 투어를 하듯 안내하며 다양한 층위의 창작자―미대 출신을 불문하고―와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파프룸은 여러 변수와 영향 관계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파프룸의 활동과 우메츠 본인의 작가 활동은 어떻게 이어져 있을까? 나아가 작가 개인은 그동안 어떤 작업을 해 왔는가?
와타리움에서 열린 우메츠의 개인전 《폴리네이터》에서 그간 작가가 선보인 작품을 다수 만나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작가인지 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매체에 걸쳐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드로잉, 회화(표현이 사실적인, 추상적인, 심지어 점묘법까지 아우른), 도예, 영상이 한데 어우러져 소개되는 공간에 들어선 감상자는 분명 당혹스러울 것이다. 설령 파프룸의 활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해도 어떻게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하나의 꼭지를 제안하고, 《폴리네이터》전을 살펴보려 한다. 바로 여백이다.
큰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전시장에 들어선 감상자는 알몸으로 등장하는 그림과 영상 속 작가 본인을 목격한다. 작품은 도심 혹은 인공의 반대편에 자연을 설정하는 구도와 달리 불안이 생기하는 작동 방식을 그린다. 즉 순수함과 무구함 대신 불안과 이를 떨쳐버리려고 하는 거부의 관계를 여백을 통해 그려낸다. 이번 전시를 보며 시선은 자연스럽게 여백으로 향했다. 예를 들어 <플로레알>(2004-2007)(도판 2)의 침대 끝 여백과 <낮의 공허한 축제와 내적 공동체에 대해서>(2015-2020)의 묘하게 비어있는 중앙이 그러하다(도판 1). 여백은 또한 전시장 곳곳에 손으로 적은 작은 글씨 한 마디를 통해 현현한다. 2층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좋은 아침(おはよう)’이 적힌 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글씨가 쓰여 있음으로써 주변부와 그곳이 허하게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묘하게 비어 있는 부분은 전시에서 무엇을 말해줄까. 여백에 대한 우메츠의 접근 방식은 적어도 순수함에 대한 찬양이나 원초에의 회귀와는 다르다. 그가 그리는 나체가 자기애에서 출발했을지 몰라도 일방적인 자기애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이 여백이 허술하게 가리는 장식 역할을 곧 할 것 같거나 아직 안 하는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침대 끝의 여백에 충분히 이불을 그려넣을 수 있지만 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제의적인 장면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패널화 중앙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전시된 초상화 <가스미가우라 항공 비행 기지>(2006)속 인물은 군복을 입었다(도판 3). 진주만 공습에서 사망한 왕고모부가 공군에서 활동했던 무렵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드로잉 속 인물은 우메츠를 꼭 닮았다. 이들은 제복을 입었기에 용감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쟁의 이름으로 불렸기에/소환되었기에 가능했다.
벌거벗은 채 가만히 있는 모습과 제복을 착장하고 일을 하는 모습은 맞닿아 있다. 순수함을 두고 벌이는 긍정의 결과, 그러니까 자연의 상태나 용맹함을 칭송하는 대신, 순수함에 불안을 연결해 더 원초적으로 요동치는 차원으로 파고들어 간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체를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직시하는 것은 어둠, 즉 꿈 속에서 온갖 망상과 상상을 펼칠 수 있는 힘으로 이어진다. 전시장에 걸린 드로잉에는 마치 꿈의 한 장면 같은, 상상에 기댄 욕망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단어는 대부분 밤―“액체와 밤” “Long Long Night” “달과 소녀”―과 연관되어 있다. “대낮에도 커튼을 다 닫고 조금 어두운 그 방에서”라는 작품 속 한마디처럼, 낮과 밤은 불안의 밑바탕을 통해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전환한다[2]. 시선의 전환은 도예 작업(도판 4)에 더욱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전시장에 놓인 도예 작업의 구멍은 전시 제목인 ‘꽃가루 매개자(Pollinator)’의 역할을 보여준다―구멍을 통해 꽃가루를 날리는 장치라 설명되기 때문이다. 우메츠가 자주 언급하는 꽃가루의 비유는 작품이나 제작 과정에서 미치는 영향력, 즉 “표현 양식의 전염”이다[3]. 그런 측면은 물론이지만 이번 전시의 경우 ‘불안’과 ‘거부=가리기’의 관계를 대변해주기도 한다. 수없이 뚫린, 어쩌면 깨지기 쉬운 도예 작품의 허점이나 약점이 될 이 구멍은 내가 보고 동시에 내가 직시당하는 공간이 된다.
직시당하고 직시하는 곳, 곧 불안에 노출되고 자신을 숨기려는 역학을 우메츠는 파프룸 활동에도 내면화한다. 파프룸은 다른 작가 지망생과 우메츠 본인이 ‘꽃가루’로 매개됨과 동시에 직시하고 직시당하는 곳으로 운영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취미 미술로 가지 않고 상업 갤러리 소속 작가나 인지도가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예술가 지망생(즉 ‘코뮌’의 일원)의 작품과 한자리에 거는[4] 이유는 권위를 세우거나 추락시키려는 것이 아닌, 비교와 대조를 통해 역학을 창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와타리움에서 볼 수 있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나체를 그린 그림 및 영상과 (마치 꿈처럼)돌발적인 상상이 펼쳐지는 드로잉은 단순히 전자 혹은 후자를 그저 그것 자체로 찬양하지 않는다. 군복을 입었거나 서양의 형식을 답습한 근대 화가의 형식을 착장한 자화상[5]은 시대적 요구에 소환되던 역사가, 심지어 현대 미술이라는 오늘의 역사까지도 불안의 기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벌거벗음에 순수함을 칭송하는 대신 이를 두고 벌이는 매개 관계, 바로 불안과 불안을 해소하려는 관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여백은 이번 전시에서 비어 있음의 충만함과 같은 미학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장은 낮과 밤을/에[6]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불안을 둘러싼 역학이 돌발적으로 펼쳐진/펼쳐질 공간이다. 비어 있다가 가려지기도 하고, 동시에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 작가가 드로잉으로 표현한 것처럼, 설령 꿈속에서 설렐 수 있을지언정 그 설렘은 사실 아무것도 입지 못한 상태의 뒷면이다. 이번 전시의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은 그가 직시한/직시당한 불안의 ‘앞뒤를 가리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앞과 뒤는 불안의 양면이며, 가리는 것, 즉 선을 긋고 은폐하는 것은 불안의 기저에서 돌발에 앞서지 않는다.
[1] 파프룸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바란다. 전시 《호버링》 도록 『Hovering-Text』 수록, 「도쿄와 서울, 무엇을 위한 대안일까?: 의사-전략으로서의 전시공간」
(2019), 월간 「미술세계」 2019년 11월호 WORLD ART: 「일본의 전시 공간③미술씬에서 교육과 실천하기」(2019.11).
[2] 우메츠의 드로잉은 그를 닮은 왕고모부의 일기 내용과 함께 펼쳐진다. 전장으로 떠난 왕고모부가 남긴 일기에는 그가 꿈에서 본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는 마치 본인이 본 것 같은 착각과 기억 속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노부오(왕고모부) 사진이 많이 남아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저는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제 얼굴과 꼭 닮아서 목소리도 아마 같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노부오의 꿈에 나온 여인은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종종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메츠 요이치, 「램에서 머튼으로」, pp.8 (梅津庸一ほか 『ラムからマトン』 ART DIVER 2015 수록) 다시 <가스미가우라 항공 비행 기지>로 돌아오자. 왕고모부를 닮은 작가는 제복을 입은 왕고모부를 그린 것일까, 작가 본인이 제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일까? 어느 누구 혹은 어떤 것의 이름으로 불리는/소환되는 것은 전쟁에서 국가를 대표하기도 하고 그의 드로잉처럼 시공간이나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3] 우메츠 요이치, 「램에서 머튼으로」, pp.8-9
[4] 예를 들어 파프룸에서 기획한 전시 중에 <별자리와 만남 사이트 혹은 회화와 단체전에 대하여>(파프룸갤러리, 2019.10.5-10.14)가 있다. 상업 갤러리 전속 작가와 미대 출신이 아닌 작가, 미대를 다니는 유학생의 작업을 한데 모아 소개하였다.
[5] 우메츠는 19-20세기에 활동한 화가의 작품을 참조한다. 이번 전시 출품작인 <플로레알 - 지저분한 빛에 뒤섞여 있는 거대한 꽃가루>는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의 <플로레알>(1886)을 참조한 작품이다. 본 전시에 출품되진 않았지만, 그는 일본 화단에 서양화풍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의 <智・感・情>(1899)을 바탕으로 <智・感・情・A>(2012-2014)를 제작하기도 했다.
[6] 밤낮없이 찾아드는 불안은 무엇이든 가리기만 하면 해소된다.
콘노 유키
한국과 일본에서 전시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 2018년 «애프터 10.12»(시청각), 2019년 «신생공간 전: 2010년 이후의 새로운 한국 미술»(카오스*라운지 고탄다 아뜰리에, 도쿄), «한국에서의 8명»(파프룸갤러리, 사가미하라), 2021년 박지혜 개인전 «Lepidoptera» 등 공동 기획자로 참여하였다.
교정: 유정민
서울에서 크고 작은 사물을 만들며 살고 있다. 2021년 «언제나 나는 여기서 웃고 있어»(에브리아트, 서울) 외 2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2021년 «三Q»(三Q, 서울), «한국에서의 8명»(파프룸갤러리, 도쿄)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쇼룸 형식의 공간 ‘三Q’를 동료 작가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三Q:@3q2021(Twitter)/@3q_3q_3q(Instagram)
일본어 번역은 여기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note.com/misonikomi_oden/n/n08e2e463bc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