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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31일, 나는 항상 스시를 먹는다.

vol.1 스시

오빠가 발작을 일으켰다가 다시 진정을 찾으며 잠깐 동안의 평온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숨 돌리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나는 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아 멍하니 오빠를 바라본다. 아무리 위독하다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병원 1인실에 내리쬐는 초여름의 포근한 햇살이 평화로운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바깥 공기는 이토록 상쾌한데 말이다.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어야 할 오빠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서서히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공기를 잡으려고 하더니 이번엔 그 손을 입가로 가져와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다. 하나씩 그리고 또 하나씩 무언가를 집는 시늉을 했다. 

“엄마, 오빠 좀 봐! 뭔가 먹고 있는 거 같아. 이것 봐, 또 그러네!”
“진짜네. 혹시 스시? 네 오빠가 정말 좋아하잖아.”

오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환상 속의 스시를 맛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조개관자에 그 다음은 연어알 초밥일까. 정말 행복한 환각이다. 엄마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키득 키득 웃었다. 

간병을 위해 병원에 머문지도 일주일째가 되었다. 피로와 함께 긴장감도 켜켜이 쌓여가던 우리에게 오빠는 언제나처럼 웃을 수 있게 해줬다. 

           *

오빠는 세 살이 되던 해에 병이 들었다. 그 이듬해에 이바라키현에서 내가 태어난 이후로는 할머니와 함께 도쿄의 병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24년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 왔을까. 병원 안에서는 귀여운 미소와 개구쟁이 캐릭터로 인기가 있던 오빠에게는 입원보다는 ‘병원에서 사는'이란 표현이 더 어울렸다. 새로 들어온 환자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대신 간호사를 호출해 주거나,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던 신참 간호사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도 오빠의 역할이었다.


“오빠는 무슨 병이야?”
어른들은 몇 번이고 되묻는 내 질문에, 어릴 적엔 원인불명의 병이라고만 대답해줬다. 여태까지 세 군데의 병원을 전전하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의사들을 겪어 왔다. 이렇게나 의료 기술이 발전한 지금조차도 오빠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억울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자, 엄마는 내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실을 들려줬다.
“애기 때는 나무랄 데 없이 건강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 홍역이 유행하는 바람에 오빠도 집 근처 소아과에 데려가 진찰을 받았어. 근데 당시에 치료가 잘못됐었나봐… 독한 약을 써서 발진을 가라앉혔거든. 그 뒤로 구내염을 앓더니 입속부터 식도까지 심하게 헐어버렸어. 그리고 그때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바이러스가 몸속에 남아서 계속 오빠를 괴롭히고 있나 봐. 암이라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진짜 병명은 아직까지도 모르는 상태야.” 

“그건 의료 과실이잖아!”
나는 본 적도 없는 의사에게 화가 솟구쳐 올랐지만, 20년도 더 지난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집 근처의 소아과'라고 해도 엄마는 병원 실제 이름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인기 있는 소아과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그곳이었는지 아니면 외갓집 근처의 소아과였는지 가려내는 것은 어쩐지 조금 두렵기까지도 했다. 부모님이 그 소아과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판을 전전하며 에너지를 쏟기보다도 오빠를 살리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토론조차 꺼리는 평화주의 성격의 아버지는 의사를 고소할 리 없었다. 

그 후로 엄마의 인생은 오빠가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오빠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 살 때 발병한 뒤, 매년 오빠의 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증상들이 차례차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다섯 살 되던 무렵까지는 늘 안절부절못하던 엄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빠와 함께 뛰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오빠는 그 뒤로 마음대로 걷지 못해 휠체어에 앉았고, 결국에는 고관절이 틀어지고 말았다. 한 가지 그리고 또 한 가지씩 본래의 신체 기능을 대체하는 인공물들이 오빠 몸의 일부가 되어 갔다. 매일 수액을 꽂기 위해 가슴에는 포트를 심었더니 일부분은 터미네이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배꼽에 연결된 굵은 관은 녹색의 위액을 외부의 파우치로 배출하는 역할이다. 예전에 받은 수술을 통해 목에 구멍을 뚫었는데, 거기서 쇳소리가 들리면 가래침을 빨아들여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증상에 맞서야 하는 오빠 본인과 의사 선생님들에게 그것은 마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와도 같았다. 머리와 눈 그리고 귀가 유일하게 손을 쓰지 않은 부위였다. 그런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어가자 오빠의 몸은 완성형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의료 기술이 집대성된 결정체와도 같았다. 

그리고 오빠의 마음은 삶에 대해 늘 긍정적이었다. 아픔을 견디느라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은 수도 없이 봐왔지만, 정작 오빠의 트레이드 마크는 입을 크게 벌리고 깔깔대며 웃는 얼굴이다. ‘힘들어’라는 말조차 오빠의 입을 통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상태가 호전되어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오빠 몸에 장착된 모든 기구를 엄마가 돌봤다. 분해해서 깨끗하게 닦아 교체하고, 때로는 피가 흘러나와도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베테랑 간호사 못지않은 냉정함을 유지했다. 나도 초등학교로 올라가자, 마치 신참 간호사가 된 듯 수액 교체나 가래침 흡인 등 엄마를 거들 수 있는 일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탓인지 피가 나서 엉엉 울고 있는 꼬마 아이들이나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 친구들을 보면,“괜찮아?”라고 걱정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론 ‘그 정도로는 죽지 않아’라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일은 가래가 굳어져 목구멍에 연결된 호흡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건조하다 싶으면 가습기를 목구멍에 대고 가래침을 흡인한다. 가래가 굳어지면 목에서 퓨우 퓨우하고 소리가 나는데, 꿀럭이는 큰 덩어리가 빠지고 나면 오빠는 만족스러운 듯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사인을 보냈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산소가 부족해 오빠 얼굴이 새파래진 경험은 몇 번이고 닥쳐왔다. 엄마가 장시간 외출해야 할 때는 나 아니면 언니가 대신 흡인을 맡아야 했다. 가래 덩어리를 잘 제거했을 땐 “이만큼이나 큰 게 막혀있었어!”라며 나도 잘 할 수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지만, 아무리 해도 힘에 부칠 때는 어쩔 수 없이 엄마한테 SOS를 요청하곤 했다.

오빠는 심호흡을 하더니 칵 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안되겠어, 계속 막혀 있어…”

나는 가습기와 흡인기를 모두 사용하며 가래침 덩어리와 분투 중이었다. 오빠와 서로 집중해서 호흡을 맞추며 몇 번이나 세차게 숨을 뱉는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TV를 보며 웃고 있었는데, 오빠는 이렇게 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엄마, 언제쯤 집에 올 수 있어? 오빠 목이 막혔는데, 아무리 해도 안 나와.”
내가 하든 엄마가 하든 다를 바 없었지만, 오빠나 나나 엄마가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 이미 다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왔다 얘들아! 왜 다들 겁먹고 있는 거야?
괜찮으니까 자,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어. 옳지, 한 번 더.”

가령 오빠가 밖에 있다거나 병원 안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호흡구가 막혀버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의료 기술의 걸작품이 겨우 저 코딱지 같은 덩어리 때문에 그 생명을 잃고 만다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오빠는 입을 통해 영양소를 섭취할 수 없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수액만으로 연명해 왔다. 수액을 맞지 않을 때 빼고는 오빠는 늘 수액 호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걸을 수 있을 때도, 호스 때문에 가동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 “저것 좀 갖다줘 봐, 이것 좀 치워줘 봐"라며 주변에 부탁을 했다. 오빠는 자기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명령조가 아닌 ‘해줘 봐’라는 표현을 썼지만, 가끔은 그런 표현이 오히려 나를 짜증 나게 할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서 수액이란, 인간이 평생 액체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물론, 오빠는 이미 20년 넘게 계속해서 그걸 몸소 증명해 왔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아기에게 먹일 분유를 타듯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영양소가 담긴 가루를 사람의 피부 온도와 비슷하게 데워진 물에 섞어, 전용 수액 파우치에 담아 흘려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액체는 탁한 백색이었고 삶은 감자 같은 냄새가 나서 맛이 없는 것 같진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자 제약회사를 바꿨는지, 상당히 세련된 수액으로 바뀌었다. 무색투명했는데, 맛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향이 없는 액체였다. 수액 파우치의 입구를 열고 주사기를 사용해 소량의 액체를 담은 뒤, 조그만 유리병에 담긴 하얀 약에 투입하여 섞는다. 그리고 주사기로 그 약을 담아 다시 파우치에 넣으면 오빠의 식사는 완성되었다. 

필요한 영양소는 수액으로 보충했지만, 오빠의 ‘식욕’은 오직 혀로만 채울 수 있었다.
“있잖아 오빠, 깜빡했다 치고 그대로 삼켜 보면 어때?”
“그럼 목구멍으로 다시 나올지도 몰라. 킥킥"
아무리 꼬셔봐도 침조차 삼키지 않으며, 한입 한입 맛을 보고 느낀 후에는 전용 통에다가 야무지게 뱉어낸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가족 중 누구보다도 식탐이 있던 오빠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새우튀김의 알맹이만 쏙 빼서 먹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vol.2 듀얼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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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이후로도 한동안 오빠는 도쿄에 위치한 병원에서 이바라키에 있는 집으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당시에는 이런 용어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오빠야말로 듀얼 라이프의 선구자였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설날 그리고 *시치고산 때 찍은 가족사진은 모두 행복이 가득한 가정의 모습이었지만, 오빠는 사진에 등장할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 3세, 5세, 7세가 되는 어린이들의 성장을 축하하는 일본의 전통 행사

오빠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엄마와 함께 이시즈카에 사는 외할머니가 교대로 간호했다. 엄마가 없을 때면 세 살이 된 나는 한 살 위인 언니와 함께 친할머니 댁으로 보내지거나,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에서 맡아주기도 했다. 가끔 외할머니나 친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고 간 적도 있었다.

농사를 짓는 친할아버지 댁에는 커다란 덤프트럭이 있었다. 네 명의 사촌 형제들이 모두 덤프트럭 할아버지, 덤프트럭 할머니라고 불러서 나와 언니도 그렇게 불렀다. 덤프트럭 할아버지의 생김새는 만약 우리 아빠가 대머리였다면 꼭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이구 어서들 와!”라고 반기시며, 아빠처럼 늘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시지만 본인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분이다. 덤프트럭 할머니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둥글둥글해지셨지만, 교사였을 당시에는 약간 깐깐하신 분이었다. 언제나 온화하셨던 이시즈카의 외할머니한테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 같은 안심감이 느껴졌지만, 덤프트럭 할머니는 아무리 다정하게 우리를 대해주셔도 함께 있으면 약간 긴장을 하곤 했었다. 그건 덤프트럭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있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엔 토모짱 집에서 자고 싶어!”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집에서 자는 일은,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언제든지 제2, 제3의 엄마라 할 수 있는 어른들이 돌봐주시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다. 그래도 여전히 어렸던 나는 언니와 함께 커다란 저녁놀에 엄마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또 덤프트럭 할머니가 실수로 내 발에 장아찌 누르는 돌을 떨어트렸던 말도 안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열이 나는데도 언니와 함께 신나게 뛰어놀아서 제2의 엄마한테 제대로 야단맞았던 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이다. 어디서든 잠들 수 있고,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는 내 성격은 아마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 같다. 

당시 30대였던 아빠는 한창 부지런히 일할 때였다. 우리들도 그때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 평일에는 좀처럼 돌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한번은 아빠가 내 머리를 잘라줬다가 망친 적이 있었다고 언니가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던 적이 있다. 분명 서툴긴 했어도 아빠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우리들을 키우려고 했을 것이다. 확실히 내 머리를 묶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고, 나는 큰 애정을 받았던 것 같다. 소꿉친구들도 말하길, 우리 아빠는 옛날부터 딸바보였다고 한다. 나도 그런 무한한 애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빠는 진지한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장난을 치며 가족들을 웃기려고 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말의 행복이란,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빠와 엄마가 있는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 아빠는 차를 굉장히 좋아해서 도장이나 수리까지 스스로 해결하고, 장시간 드라이브도 개의치 않았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친하게 지내던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녔는데, 그 때도 목적지가 어디든 아빠는 항상 운전기사 역할을 도맡았다. 

주말이 되어 도쿄로 향하는 길이면, 아빠는 늘 우리에게 “자고 있어.”라고 했었지만, 피곤해보이는 아빠가 혹시 운전 중에 깜빡 졸기라도 할까 봐 어린 마음에도 걱정하곤 했다. 

“아빤 안 졸려?” 뒷자석에 앉은 나는 수도 고속도로의 주황색 불빛에 비친 아빠의 옆얼굴을 계속 감시했다. 조금이라도 지친 기색이 보이면 운전석 뒤에서 손을 뻗어 어깨를 주무르기도 했다. 아빠는 우리가 얌전히 잠들어 주는 게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밤에 수도 고속도로를 달릴 땐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가끔은 아빠, 언니와 함께 셋이서 도쿄의 호텔에 머무를 때도 있었다. 욕조의 사용법을 몰라 카펫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일도 있었고, 언니와 함께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 점프하던 일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근처에 롤러코스터가 보이던 그 호텔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주말에 병원에 가서 엄마를 만나면, 차 뒷좌석을 평평하게 만든 뒤 그 위에서 가족끼리 오손도손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아빠 말 잘 듣고 있었어?” 아빠가 삐뚤빼뚤 묶어준 머리를 엄마가 다시 빗어주면서 우리는 이바라키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오빠는 때때로 면회 금지라서 만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병원 안에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고 한다. 나는 늘 엄마의 어깨를 주물렀다. 당시의 내가 엄마 아빠한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열심히 어깨를 주무르는 일 정도였던 것이다. 

도쿄와 이바라키를 오가는 듀얼 라이프는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vol.3 나의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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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오빠를 집 근처의 아동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는 우리 가족의 생활이 크게 달라지는 빅 이벤트였던 것이다. 아무리 입원 중이라도 집에서 20~30분 정도만 가면 언제든지 오빠를 만날 수가 있었다. 단, 규칙이 매우 엄격해서 아무리 부모라 해도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만날 수 있었고 부모 외에는 형제라 해도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병실은 2층 계단을 올라가 양옆으로 뻗은 복도를 지난 곳에 위치했다. 아동 병원답게 입구 유리문에는 포동포동한 코끼리나 햇님 같은 사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에 병실이 하나씩 있었는데 오빠는 대부분 오른쪽이었다. 면회를 하려면 입구 옆에 있는 탈의실에서 손을 씻고 전용 가운으로 갈아입은 다음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운을 입은 엄마가 나타나 바깥에서 바라보던 우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 두 번째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문 두 장 너머 안쪽에서는 혼자 수액 거치대를 밀면서 걷고 있는 아이, 엄마가 휠체어를 밀어주는 아이, 상냥해 보이는 간호사님들이 서둘러 걷고 있는 병실 내부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매일같이 그리고 아빠는 가능한 한 면회 시간 내에 오빠와 시간을 보냈는데, 가끔은 오빠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와 줄 때도 있었다. 나와 언니는 문밖에서 오빠를 한 번 보고나면, 다시 복도의 벤치에서 몇 시간이나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색칠 공부나 그림책도 이제 지겨워졌다. 좌우 병실을 연결하는 긴 복도에는 두 줄의 평행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평균대로 삼아 걷기도 하고 묵찌빠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언니와 시간을 보냈다. 

병원을 옮긴 뒤에도 우리 가족에게는 계속해서 빅 이벤트들이 생기면서 오빠는 골수이식을 받기로 했다. 위키피디아 일본판에 의하면, 골수이식이란 ‘백혈병이나 재생 불량성 빈혈 등의 혈액 관련 난치병 환자에게 제공자의 정상적인 골수세포를 정맥 내에 주입하여 이식하는 치료'이다. 뼈를 깎는 것이 아니라 허리뼈 속에 있는 골수를 주사기로 추출해 환자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나는 설명을 들을 때마다 꼬리곰탕에 들어 있는 딱딱한 뼈와 그 속의 젤라틴을 상상하게 된다. 아동 병원 측에서는 때마침 이식 수술에 성공하면서, 우리 오빠도 한번 시도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어온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케이스도 적었기 때문에, 수술이 잘 되면 오래 살 수 있었지만, 이식을 하고나자 몸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도 컸다. 병원의 연구가 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오빠의 생명을 위한 이식인 것인지, 믿음 그리고 신뢰 같은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골수이식’이라는 희망적인 빛에도 복잡한 문제들은 얽혀있었다. 

이식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단 더 중요한 것은 백혈구형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제공자를 찾는 일이었다. 백혈구형은 수백에서 수만 가지나 된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에는 아직 골수 은행이 없어서 우리 가족을 비롯해 친척들과 많은 지인들이 감사하게도 함께 채혈 검사에 협력해 주셨다. 

며칠 후, 수십 명의 제공자 후보 가운데 내 백혈구형이 딱 맞아떨어진다는 기가막힌 결과가 나왔다. 골수이식의 기역자도 잘 모르는 유치원생이었던 내가 갑자기 ‘구세주’가 되어 진두에 서게 된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성인이라면 척수 쪽의 수술로도 충분하지만, 나는 몸이 너무 작아서 허리를 한 바퀴 둘러 주사바늘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처치 흔적은 크면 다 없어질 거라고 엄마와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나는 어려운 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빠를 구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 어쩐지 뿌듯했다. 엄마가 내게 제공자가 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뿌리칠 이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더 겁이 없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별일 아닐 거야’라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건강 체질이었던 나는 살아오면서 이때 유일하게 병원에 입원하는 경험을 했다.

입원 첫날, 간호사님을 따라 처음으로 오빠가 있는 병실에 들어갔다. 대기실이나 복도에서와는 다른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온도도 뜨듯한 편이었다. 나는 밖에서 상상하기만 했던 병실 안을 눈치를 살피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동 병원 안에는 비슷한 또래의 나이에 이런저런 치료를 받는 아이들이 있다. 약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진 아이, 머리가 크게 부풀어 오른 아이, 외관상으로는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는 아이도 있었다. 오빠에게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내게 있어선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오빠가 살아온 세계를 엿보게 된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오빠와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건 왠지 좀 쑥스러웠다. 그때 병실 밖으로 나간 간호사님과 엄마가 하는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남매가 오랜만에 만났네요?”
“그러게요. 막내랑 얘기하는건 아마 삼 개월만일 거예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니 나는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빠, 오랜만이야!”라고 말하고서는 웬지모를 쑥스러움에 그 다음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오빠는 내가 오는 걸 진심으로 기다리며, 색도화지에 색종이를 붙여 편지를 써주었다. “고마워, 같이 힘내보자.” 라는 메시지에 나는 더 몸둘바를 몰랐지만, 병원 생활 대선배의 말은 무척이나 든든했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은 검사와 수술 준비가 계속 되었고, 나는 채혈 주사를 맞는 일에도 꽤 익숙해졌다. 아동 병원인 만큼 간호사님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절한 언니처럼 대해주셨다. 언제나 인기 캐릭터가 그려진 펜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들의 주의를 끄는 것에도 능숙했다. 

매일 저녁 무렵 엄마가 면회를 오면 넓은 키즈룸에서 디즈니 TV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신참이었던 나는 누군가 먼저 게임을 하고 있으면 “나도 한 번만.”하고 말도 못한 채 멀찌감치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면회 시간은 제한되어 있어서 엄마는 밤이 되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내가 가지 말라며 운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오빠도 그렇게 울었던 적이 있었을까. 

병원에서는 딱 한 명의 친구가 생겼다. 키즈룸에서 나보다 먼저 디즈니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애였다. 나는 병원 안에서는 숫기가 없는 편이었는데, “사이좋게 지내렴.”하고 엄마가 대신 말을 걸어준 뒤로 몇 차례 서로의 병실에 놀러 갔다. 휠체어를 타는 것도 아니고 수액을 맞는 것도 아닌 그 애가 무슨 병으로 입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내게 바이바이라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 애는 병동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병원 내의 친구 사이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퇴원한 것인지, 다른 병원으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혹시… 그 후의 일은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술 당일이었다. 새로 받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수술실 근처에 놓인 환자 이송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녀오겠습니다.”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 엄마 아빠. 나를 향한 부모님의 강렬한 시선과 긴장감을 피하려는듯 고개를 돌리고 지극히 태연한 척 몸을 맡겼다. 하지만 내 표정은 분명 굳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수술실 입구에 도착하자 평소엔 절대 가까이 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간다는 호기심이 무서움을 눌렀다. 수술실 안에는 뭐가 있을까…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었던 내 기대와는 반대로, 새하얀 불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간호사님이 “무슨 맛이 좋아?”라고 묻길래 내가 고른 초코 맛 마취약을 먹고, 하라는 대로 양을 세기 시작했는데 세 마리쯤 세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마취약은 초코 맛 외에도 딸기 맛과 바나나 맛이 있었는데, 내가 먹은 약이 실제로 초코 맛이 났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마취에서 깨자마자 내가 뱉은 말은 ‘103’이었다. 눈을 떠보니 침대 옆에서는 엄마가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참았어. 갑자기 네가 숫자를 말하니까 아직도 양을 세는 줄 알았단다.” 

지금까지도 눈 뜨기 직전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일러스트에 등장할 법한 양들이 한 마리씩 차례로 나타나더니, 가벼운 인형처럼 뿅하고 저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다음 양이 나타나 날아가기를 반복했다. 솔직히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순순히 양을 세고 있었다. 

그 후에는 다행히 오빠한테 이식하는 수술도 모두 성공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수술 후에 한동안 내 허리가 90도로 휘어졌다는 것 정도다. 원래대로 돌아가기까지 한 달은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그런 모습을 하고도 활기차게 뛰어노는 나를 보고 간호사님들이 웃어주는 게 나는 재밌었다. 노인 같은 모습을 했지만 알맹이는 기운이 넘치는 유치원생이었다. 퇴원할 때까지 매일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때로는 비닐 커튼으로 둘러싸인 오빠의 무균실에도 찾아갔다. 오빠는 누운 채로 팩맨이나 슈퍼마리오 같은 게임을 갖고 놀았는데 나는 그게 조금은 부러웠다. 


퇴원 후에는 몇 주 동안 집에서 요양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유치원에 간 첫날에는 잔뜩 기대하던 줄넘기 대회가 열렸다. 나를 걱정하셨던 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은 내게 그냥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나는 넘치는 에너지로 1등을 하고 말았다. 내 건강한 몸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상당히 건강한 골수를 이식한 덕에 오빠의 상태는 안정되어 갔다. 나의 일부가 지금은 오빠의 일부가 된 것이다. 가족 그리고 남매 이상이자 일심동체 미만이라는 감각. 그때부터는 신기하게도 내가 이따금 감기에 걸리거나 하면 오빠도 꼭 열이 나곤 했다. 내가 먼 곳에 가게 되면 컨디션이 좋았던 오빠가 다시 병원에 들어가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나와 오빠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vol.4 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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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빠는 특수 학교가 아니라 1년 늦었지만 시립 유치원과 그 옆에 있는 시립 초등학교 그리고 시립 중학교에 다녔다. 그 유치원에서 우리 집과 친하게 지내는 세 가족, 내게 있어서 제2, 제3의 엄마가 된 분들을 만나게 된 걸 생각하면, 당시에 입학을 허가해 준 원장 선생님께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오빠는 지능 장애에 해당하지 않기에 특별 학급이 아니라 일반 학급으로 배정되었다. 유치원과 학교 측의 허락을 받기 위해 엄마가 고군분투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년만 다녔던 유치원에선 선생님들 외에는 다른 친구들의 형제 관계에 대해 알 까닭이 없었다. 한편, 6년간 다녀야 하는 초등학교에선, 내가 입학했을 때 이미 오빠는 학교 안에서도 어느 정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우리 남매가 모두 같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언니와 내가 차례대로 입학하자 “아~ 네가 마사유키 동생이구나!” 하며 말을 걸어온 사람도 있었다.

“너네 오빤 식물인간이야?”
갑자기 호기심 왕성한 유타가 내게 별다른 뜻 없이 물어왔다. 유타는 부모님이 이혼하고부터 싸움이라던지 물건 훔치는 걸 반복해서 학교 안에서는 이른바 문제아로 찍힌 아이였다. 기분이 좋을 땐 반 전체의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손댈 수 없는 문제아 패거리의 짱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어째서인지 유타와 자주 수다를 떨었다. 애교도 있는 그 애가 늘 그렇게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유타가 던진 돌직구에도 나는 기분이 상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빤히 쳐다보는 어른들보다 훨씬 나았다.

“아닌데? 걸을 수도 있고(당시에는 아직 걸을 수 있었다), 말도 할 수 있고(성대가 없지만 익숙해지면 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머리도 보통이야(공부도 가능했다). 단지 원인 모르는 병에 걸린 것뿐이야"
“그렇구나, 너도 힘들겠다.”
“뭐 그냥.”

돌봐야 하는 형제가 있는데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정말 힘들다는 감각은 마비되어 있었다. 크게 싸운다거나 동생을 괴롭힌다거나 다른 의미로 속을 썩이는 오빠들은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이나 장애라는 필터를 씌우기에 앞서 내게는 그저 우리 오빠라는 존재였다. 

그렇다 해도, 장애투성이인 오빠를 돌봐야 하는 일이 지겨워지는 순간은 내게도 이따금 찾아왔다. 한 걸음 외부로 발을 내딛으면 신기한 생물을 관찰하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거나 에일리언이라도 마주친 듯한 얼굴을 몇 번이나 봐왔다. 

그러다 내가 오빠를 소위 장애인이라고 깨닫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내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존재인 오빠가 세상에서 다른 취급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특수 학교 아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오빠가 장애인 중 한 명이라는 걸 뼈저리게 자각했다. 

입학 허가의 벽은 높았지만, 어쨌든 허가를 받고 나니 다행히도 오빠를 맡게 된 담임 선생님들은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다. 아직 미혼이었던 유치원 선생님은 연례행사와도 다름없는 우리 세 가족의 여행에도 따라오실 정도였다. 제1, 2, 3의 엄마들 모두는 선생님을 ‘쇼짱, 쇼짱’이라고 부르며, 그녀의 중매 상대마저 궁금해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원장 선생님은 덩치는 작지만 두툼한 뱃살을 지닌 그야말로 호호아줌마였다. 하이톤의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물씬 풍겨났다. 엄마는 지금도 원장 선생님과 가끔씩 만나 식사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오빠의 담임을 맡으신 베테랑 여선생님은, 관록과 풍격을 지녔으면서도 아이들을 감싸주는 관대함 또한 갖추신 분이었다. 학교 측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신입생을 받아들이게 되어 선생님들께서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붙어 다니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등하교나 소풍 이외에는 선생님께서 돌봐주셨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생님 중 한 분이다.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셔서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정말이지 그때처럼 초조했던 적은 없었어요. 문득 마사유키 목에 달려있던 마개가 사라진 걸 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예요.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면 어떡하나, 어머님께 바로 연락하는 편이 나은가 하고 말이죠. 그렇게 필사적으로 마개를 찾고 있는데, 마사유키를 돌아보니 “선생님 괜찮아요”라며 태연한 거예요. 어떤 상황이 위험하고 언제가 괜찮은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던 거죠. 그래서 안심하고 다시 마사유키에게 가보니 옷에 마개가 매달려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아이고, 정말 둘이서 한참을 웃었네요.” 

그때 당시 목 부분에 사용하던 장치에는 마개가 달려 있었는데, 집 밖에서는 가래를 제거할 경우 외에는 항상 구멍을 닫아 놓았었다. 감염 예방과 더불어 호흡이 밖으로 새지 않아 목소리가 잘 들리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열어 놓을 때가 더 많았고, 말하고 싶을 때는 오빠가 자기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으면 목소리가 잘 들렸다. 그래서 마개가 없어졌다고 해서 당장 오빠의 상태가 급변하는 일은 없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은 그런 조그만 장치 하나하나까지도 주의하고 계셨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오빠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거나 때로는 계획에 없던 진찰을 받을 때도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 마치 밀림과 같은 적막한 공기가 감돌았다. 먼저 돌아와 있어야 할 오빠와 엄마가 집에 없으면, 단지 진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뿐인지, 아니면 또 갑자스레 입원하게 된 건지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집에 돌아오자 한동안 입원해 있던 오빠가 퇴원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에 있을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로 말하자면 매년 열리는 메인 이벤트였다. 아버지들은 일찍 일어나 운동장에 돗자리를 깔아 자리를 맡고, 어머니들은 커다란 찬합에 도시락을 준비했다. 우리 집과 사이가 좋은 가족들은 물론, 오빠와 같은 반에 초밥집을 하던 가족도 화려한 칠기 그릇에 스시를 준비해 함께 둘러앉았다. 또 안면이 있는 분들이나 동네 분들이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돗자리 한 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었는데, 우리 쪽 돗자리만 마치 마을 잔치가 벌어진 듯 시끌벅적했다. 

오빠는 입퇴원 일정에 맞춰 이 초등학교와 병원 내의 학교를 왔다 갔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처음으로 한 달간의 개근상을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같은 반 모두가 엄마와 등교하는 오빠를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축하해!”라며 성대하게 반겨주었다. 칠판에는 축하한다는 일러스트 글씨를 써놓고, 교실 안을 장식하고, 모두가 참여한 롤링페이퍼까지 준비해 주었다. 

“마사유키, 축하해! 열심히 했네!”
“축하해! 진짜 멋있어!”
“축하해! 계속 건강해야 돼.”
“네가 있으면 교실이 밝아져. 앞으로도 매일 와!”
“앞으로도 신기록 세우자! 응원할게!”

오빠는 좋은 선생님뿐만 아니라, 좋은 반 아이들도 만났다. 

vol.5 종이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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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두툼한 손가락을 가졌지만 보기완 달리 손재주가 뛰어났다. 오빠의 ‘놀이'로 말하자면 건담 프라모델이나 미니 레이싱카 조립이었다. 장난감 상자 속에는 이미 300대는 족히 넘는 건담이 들어 있었고, 마음에 드는 걸로 꺼내 늘어놓고는 전투 놀이를 즐겨했다. 미니 레이싱카는 줄칼과 공구를 사용해 개조하면서 극한의 경량을 추구하고 차체 밸런스를 조정했다. 너무 가벼워도 레이스 중에 뒤집어져 버리고 무거워도 생각만큼 스피드가 나오지 않는다. 타이어를 갈거나 모터를 바꾸면서 세상에 한 대뿐인 슈퍼카를 만들곤 했다. 주말이 되면 아빠와 미니 레이싱카 전용 트랙에 가서 자랑스러운 슈퍼카를 조종하는 것이 낙이었다. 내가 바비인형을 좋아하기 전까지는 건담과 미니 레이싱카를 갖고 오빠와 함께 노는 일도 많았다. 

미니 레이싱카를 만들 때는 해프닝도 종종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순간 접착제 사건은 역대급이었다. 좀처럼 나오지 않던 접착제의 주입구를 들여다본 순간, 슉하고 나온 액체가 오빠 눈에 명중한 것이다. 외할머니는 “눈이 안 떠져!”라며 난리 치는 오빠를 슬쩍 보더니, 기지를 발휘해 물을 담은 주사기를 가지고 오셨다. 서둘러 주사기를 사용해 눈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을 쏘니, 잠시 뒤에 눈이 번쩍하고 떠지면서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때 만약 외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오빠는 또 하나의 설명할 수 없는 장애를 떠안을 뻔한 순간이었다. “다시는 접착제 구멍을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라는 오빠의 다짐에 가족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또 한 가지는 오빠가 갑자기 사라진 일이다. 어느 여름날, 오빠는 창문을 등지고 여느 때와 같이 등을 둥글게 말고 바닥에 앉아 미니 레이싱카 조립에 열중하고 있었다. “또 시작했군.” 하며 엄마와 나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보리차를 마시면서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빠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오빠는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오빠가 순간 이동을 했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놀란 엄마와 함께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창문 밖으로 떨어진 오빠는 뜰에 널브러진 채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뒤쪽의 창문이 열려있는 줄 모르고 기대려 했다고 한다. 오빠를 다시 방으로 들이고 우리는 또다시 크게 웃었다. 

오빠는 예측할 수 없는 해프닝과 웃음을 유발하는 데 천재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손재주가 좋아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던 오빠는 건담과 미니 레이싱카에서 졸업하자, 집에서 보내는 시간 중 많은 부분을 종이접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병원을 함께 다니며 돌봐주신 할머니께 배운 종이접기가 이제는 오빠의 엄청난 특기가 되었다. 볼 때마다 실력이 늘더니, 종이 한 장으로 접은 백 마리의 연결된 학, 역동감이 넘치는 사자춤이나 서글픔이 느껴지는 *카구야 공주의 이야기처럼 이제는 공예품 가게에 내놔도 될 정도의 손재주를 갖췄다. 나는 엄마와 함께 독특한 일본 전통 종이나 작품을 붙일 색지를 사러 가는 일도 점점 늘어갔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설화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의 주인공 

주말에는 아빠의 왜건 차에 수많은 의료기기와 오빠의 식량이기도 한 수액을 싣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매년 친하게 지내던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곤 했다. 장거리였던 도호쿠 지방으로 여행을 갔을 때, 오빠는 게센누마 항구에서 호화로운 *호타테동을 앞에 두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고, 밤에는 미나미산리쿠의 절벽 끄트머리에 우뚝 선 오래된 전통 여관에서 배 모양의 커다란 그릇에 담긴 생선회를 만끽했다. 여러 번 방문했던 나스에 있는 린도코 후레아이 목장에서는 매번 근사한 펜션에서 머물렀다.

*흰밥 위에 가리비 관자를 듬뿍 담은 해산물 덮밥의 한 종류

다음 여행지를 정할 때였는데, 엄마가 우연히 TV를 통해 오차노미즈에 있는 ‘종이접기 회관'을 발견했다. 그곳은 종이접기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었다. 실제로 가보니 건물 전체가 본 적도 없는 디자인의 일본 전통 종이나 창의적인 종이접기 작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시종일관 들뜬 마음으로 대량의 일본 전통 종이를 사버린 일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TV 프로그램과 인터뷰 중이던 명물 관장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관장님은 오빠가 가지고 간 작품을 한동안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작품에서는 영혼이 느껴지는구나. 이 도장을 이름으로 바꾼다면 한층 더 프로의 작품처럼 보일 거야. 앞으로도 종이접기를 그만두지 말고 계속해보렴.” 

오빠의 작품 오른쪽 하단에는 장난기 넘치는 오빠의 얼굴을 새긴 도장이 찍혀있었다. 친밀감이 들긴 하지만 프로의 눈으로 볼 땐 어린 애가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관장님의 어드바이스는 오빠의 작품을 취미나 특기에서 한 단계 끌어 올려, 오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기대 이상이었던 종이접기 회관은 오빠에게 있어서 디즈니랜드보다도 흥분되는 장소였을 것이다. 

작품은 모두 오빠와 엄마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둘이 함께 종이의 배색이나 디자인을 정하면, 엄마가 치수를 재서 종이를 준비한다. 같은 종이라도 자르는 부위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한편, 꼼꼼한 작업에 소질이 없던 나는 이 재단 작업이 너무나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엔 내 얘기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종이도 잘라주지 않잖아!” 딱 한 번, 쌓였던 감정을 토해내며 오빠가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물론 엄마가 시간이 없을 땐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고, 그걸 이유로 이따금 둘이 티격태격할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둘이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개인전을 열어보면 어떨까?”라고 말해주신 종이접기 회관 관장님의 어드바이스를 듣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의 개인전이 실현되었다. 아빠 지인의 도움 덕분에 지역 전시장에서 며칠간에 걸쳐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일정이 정해지자 사람들과의 연결고리 덕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이나 전시장으로 신문과 라디오의 취재가 몰려들어 우리 지역에서는 정말이지 반짝 스타가 된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도 “힘내라 마사유키!”라며 커다란 현수막을 제작해 전시회장에 큼직하게 걸어주셨다. 오빠는 “나는 이미 힘내고 있는걸.”하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어쨌든 많은 분들의 뜨거운 성원을 느낄 수 있던 전시회였고, 그 덕분에 오빠와 오빠의 작품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닿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오빠의 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 선물용으로 주문이 들어오는 일도 많아졌다. 

오빠에게는 종이접기 크리에이터라는 직함이 생긴 것이다.

직함에 대해 말하자면 오빠는 사장님이 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갑자기 옷 수선집을 오픈한 것이다. 지인에게 비어 있는 공간을 빌려 DIY가 특기였던 아빠와 둘이서 벽을 하얗게 칠한 뒤, 어두스름한 바였던 원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변신시켰다. 그리고 엄마는 한동안 아는 사람의 가게에서 의류 수선 일을 배운 뒤 착실히 개업을 준비했다. 

“엄마, 가게 시작했어! 오빠가 이제 사장님이니까 여기 앉아야지!”
사회인으로서 처음 맡은 사장직. 엄마는 대학 진학이나 취직도 어려웠던 오빠에게 또 다른 길을 마련해준 것이다. 오빠가 품고 있던 언니나 내게는 말할 수 없는 갈등이나 불안도 엄마한테는 훤히 보였던 것. 말 그대로 사장님의 출근은 변덕스러웠지만, 가게는 순조롭게 번창해 갔다. 

vol.6 신기한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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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너무나 좋아했던 외할머니와의 이별이었다. 지금까지 오빠나 엄마와 이인삼각을 이루어 우리 가족 사이에 구멍 날 것 같은 부분을 늘 메워주시던 할머니였다. 언제나 자상하시고 은근히 멋쟁이였으며, 배우 토요카와 에츠시와 소리마치 타카시의 팬이셨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요즘엔 할머니 냄새나! 지저분해! 하며 멀리하는 손자들도 있다는데, 우리 애들은 모두 착해서 다행이에요.”라고 자랑하시던 할머니. 그런 외할머니는 할머니댁에선 언제나 외할아버지를 무척 신경쓰셨다. 

서예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 댁에는, 주말이 되면 늘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30명 정도가 다다미로 된 넓은 방에 모여앉아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할아버지가 서예 교실을 그만두실 때까지 거기서 서예를 배웠다. “왼손으로 붓을 쥐면 안되지.”라며 오른손으로 글씨 쓰는 법을 알려주신 것도 외할아버지였다. 언제나 빨간펜으로 제자들의 글씨를 고쳐주시거나 직접 시범을 보여주시는 모습은 위엄이 느껴져서 멋있었다. 주말이 되고 서예 교실이 시작되기 조금 전에 할아버지 댁에 가보면, 외할아버지는 항상 다다미방의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전용 좌식 의자를 놓고 앉아계셨다. 안경을 비스듬히 걸치고 독서를 하시거나 몇 번이나 혈압을 재고는 공책에 기록하셨다. 고혈압이 있으신 탓에 식사 때는 염분에도 무척 신경을 쓰셨다. 

한편 외할아버지는 이른바 애주가셨다.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밖에서 마시고 오시는 날에는, 300미터 밖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시는 걸 알 수 있어서 가족 모두가 긴장했었다고 한다. 그랬던 술버릇이 지금도 조금 남아 있어서, 술이 오른 할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를 어린 나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큰 다다미방에 계시면 외할머니와 엄마는 거실에서 느긋하게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시면 할머니는 어느새 부엌으로 자취를 감추시고 함께 앉아 이야기하는 일은 적었다. 

외할아버지는 거실에도 전용 좌식 의자를 두고 거실에서는 언제나 거기에만 앉으셨다. 좌식 의자에서 손을 뻗으면 겨우 닿는 거리에는 책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늘 2리터짜리 소주가 빨간색과 파란색 각각 한 병씩 자리하고 있었다. 항상 역대 수상들의 얼굴이 그려진 오래된 컵을 내미시며“여기까지 물을 담아 올래?”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을 가리킨다. 내가 물을 담아오면 거기에 소주를 따라 낮부터 마시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으실 때는 “내가 타고 있던 배는 공습을 당해서 동료들은 모두 죽을 힘을 다해 그 넓은 바다를 헤엄쳤었지. 그렇지만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던 동료들은 대부분 죽었단다. 나는 체력을 아껴서 그냥 떠 있었으니까 구조된 거야.”라며 태평양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의 해군 시절 이야기를 몇만 번이나 들었기에 “또 시작이네.”라며 진절머리를 내고, 나와 언니도 전쟁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 때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벽장에서 누렇게 바랜 군인 수첩과 군경력증명서가 나왔을 땐 “좀 더 자세히 들어드리면 좋았을걸.”하고 후회했다. 

             *

“요즘엔 변비가 심하네. 배에 가스도 차고 힘들어서 식욕마저 없다니까.”
“병원에 가서 진찰 좀 받아봐요. 벌써 아프시면 안되니까.”
엄마도 걱정했었지만, 본인의 일은 늘 뒷전이신 외할머니가 겨우 검사를 받으셨을 땐 이미 대장암이 상당히 진행되었던 것 같다.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엄마가 할머니의 장례식 때까지 우리에게는 할머니의 병에 대해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고령이라 암이 천천히 진행되었던 것인지, 우리 남매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우리 집에도 와서 주무시고 가시고, 밤 벚꽃을 보러 드라이브를 나가거나 온천에도 함께 갔었다. 

오빠를 배려해서인지 엄마는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을 진중하게 다뤄왔다. 우리 집에서 한 번도 반려동물을 키운 적이 없었던 것은 분명 오빠의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번은, 병원

병원에 늘 따라다닌 덕분에 약에 대해서도 상당히 지식이 있던 외할머니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모르핀 만큼은 절대로 쓰고싶지 않아 한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원래도 마른 체형이셨던 할머니가 더욱 작아져 있어서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때로는 엄마보다도 오빠 가까이에 있던 외할머니가 천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부고를 듣기 조금 전, 할머니가 마치 만화 원피스의 루피처럼 하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 신기한 꿈을 꾼 것은 어쩌면 불길한 예감이었을까. 

가족 모두가 이시즈카의 외가로 달려가 오빠도 언니도 나도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우리 모두 외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그토록 대단했던 외할아버지도 완전히 풀 죽어 계셨다. 

“할머니랑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는데...”
“할머니께 더 효도하고 싶었는데...”

외할머니는 당신 자신이 오빠보다 먼저 돌아가실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할머니인 이상, 그게 세상 이치에는 맞는 일이지만 말이다. 오빠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할 수 있는 한 ‘죽음'에 관한 것들로부터 오빠를 떼어놓았던 엄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눈물을 훔치면서도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외할머니의 강력한 도움이 사라지자 엄마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그래도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간 무렵에는 오빠도 체력이 좋아져서 집과 병원에서 지내는 사이클이 3월 간격으로 안정되어 갔다. 엄마도 조금씩은 오빠와 떨어져 있는 시간도 즐기기 시작해, 나 아니면 언니와 함께 외출하는 기회도 많아졌다. 지금까지 겪어온 엄마의 고생을 생각하면 오빠를 두고 잠시 평범한 생활을 즐긴다 해도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또다시 시련을 주시려 내려오셨다. 

“장난치지 말고 옷 제대로 갈아입어!”
파자마로 갈아입지 못하는 오빠를 보며 엄마가 동요하고 있었는데, 오빠는 버튼의 조작법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번에는 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인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주말이 되자 잠시 가족 모두가 함께 외출해, 오빠가 원래대로 되돌아오기를 그저 바라고 또 바랐다. 

2주 후, 할 수 없이 오빠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시 제한된 면회만 허가되었고 나와 언니도 엄마의 보살핌에서 멀어진 생활로 돌아갔다. 매일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식탁에는 저녁밥이 차려져 있었고 엄마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엄마 말에 따르면, 오빠는 기억상실이 진행되고 있어 내 이름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내 얼굴조차 기억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감정도 컨트롤되지 않아서 엄마가 면회를 가면 오빠는 아기처럼 온종일 울고 있는 날도 있다고 한다. 다시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상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1년이 더 흘렀을까. 어느 날 갑자기 오빠의 뇌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기억을 잃어버린 동안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다시 기억이 돌아온 순간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두꺼운 데스크톱 컴퓨터 화면이 비치더니, 천천히 한 글자씩“시노부”라고 타이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시노부짱!”하고 스파크가 일어나며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시노부는 오빠의 첫사랑이다. 유치원에서 처음 만나,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오빠를 보살펴주던 여자애다. 항상 예의 바르고 가늘게 뜬 눈으로 웃는 얼굴에서는 상냥함이 묻어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릴 적부터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유도로 단련되어온 시노부는 겉보기에는 남자애들보다 씩씩했고 오빠보다 골격도 다부진 아이였다. 오빠는 시노부를 만날 때면 언제나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런 아련한 첫사랑의 감정이 1년 이상이나 계속된 원인불명의 기억상실로부터 오빠를 깨웠다. 나는 첫사랑이 무엇보다도 잘 듣는 치료제였다는 것에 놀랐지만, 어쨌든 원래의 오빠로 되돌아 와줘서 안도했다.

오빠는 이번에 의외로 종종 신기한 체험을 하곤 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고 저승길에서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암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오빠에게 “아직 네가 올 곳이 아니다.”라며 건져준 적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소름 끼치는 기묘한 이야기지만 오빠가 말해주면 신기하게도 따뜻함마저 느껴졌다. 

vol. 7 꿈에 그리던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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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작은 체구의 호빗 일가라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지금까지 계속 살아왔던 방 두 개짜리 아파트도 상당히 비좁게 느껴진다. 그 무렵 타이밍 좋게도 동네 사람이 중고 단독 주택을 팔려고 내놨다는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지금 사는 집에서도 걸어서 3분. 약간 낡았지만, 햇볕도 잘 드는 방 4개짜리의 2층집이었다. 부모님이 먼저 집을 보러 가보니, 주방의 나무 바닥이 빠져 있을 만큼 망가진 곳도 있었지만, 잘만 고치면 지금보다는 훨씬 살기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한테는 이시즈카에서 목재상을 하시는 사촌오빠가 있었는데, 그분께 부탁하니 흔쾌히 리모델링을 맡아주셨다. 당숙은 곧장 목수팀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주셨고, 2층에 있는 작은방 두 개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거기가 나와 언니가 처음으로 갖게 된 우리 둘만의 방이었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더라도 우리만의 공간이 생겨서 정말 기뻤다. 왼쪽 끝에는 침대 두 대를 나란히 놓고, 오른쪽 벽에는 책상 두 대를 사이좋게 배치했다. 당숙의 아이디어로 오른쪽 벽면에는 3단 책장도 설치했다. 

1층은 망가진 바닥을 고쳤고 가능한 한 방 사이의 경계를 없앴다. 주방과 거실 사이에는 아파트에서 가져온 커다란 식기장을 놓아 구분지었다. 이 집의 유일한 불편한 점은 좁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계단 아래에 있는 주방 왼쪽 끝에도 미닫이문으로 된 출입구가 있었다. 그래서 그 앞에 약간의 공간을 확보하고 냉장고를 놓아, 주방에서는 화장실 문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결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중고 주택에서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5년 정도를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오빠도 더이상 “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아동 병원 옆에 있는 종합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오빠는 갑자기 다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걸어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식기장을 붙들고 몇 번이고 걸음을 떼려 했지만, 오른쪽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은 마치 오빠 자신을 고문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외과의는 “아무런 이상은 보이지 않는군요. 어딘가에 염증이 생겼을지도 모르니 지켜보도록 합니다.”라며 종종걸음으로 진료실을 뒤로 했다. 언제나 살갑게 대해주던 아동병원의 선생님들이나 온화한 성격의 주치의와는 달리, 이 외과의는 아무래도 정이 가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구나… 어떻게 된 거지…”

복도로 나온 오빠도 엄마도 나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분명 이런 답답한 마음 때문에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내가 꼭 고칠거야!”하며 의사의 꿈을 갖게된 아이들도 많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아픈 곳은 나아지지 않아, 결국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았다. 이번에는 아파하는 고관절에 어쩐지 더 아파보이는 주사까지 맞았지만 끝내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른 뒤, 오빠의 고관절에서는 골절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때문에 오빠의 오른쪽 다리는 굽어진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어쩔 도리 없이 휠체어를 타게되었는데, 다다미와 문턱으로 가득한 지금의 집에서는 오빠는 엉덩이를 끌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큰마음을 먹고 미토에 있는 집을 떠나 아빠 고향에 있는 밭에 배리어 프리 주택을 짓기로 했다. 지금까지 주말이 되면 주택 전시장을 방문해 ‘이런 구조가 멋져.' ‘이런 주방이 좋아.'라며 미래의 우리 집을 수도 없이 꿈꿔왔다. 드디어 그 반짝이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인생에는 정말이지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나보다. 

또다시 당숙이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시게 되었고, 방 배치에 대한 우리 가족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셨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가족회의를 반복할 때마다 당숙은 언제나 바로바로 도면을 수정하고 눈 깜짝할 새에 완성하셨다. 할 마음만 먹는다면 멀게만 느껴지던 꿈도 어느새 형태가 잡혀가는 것이다. 

“다음번 집은 넓게 지을 거야! 우선 현관에 들어가서 복도 바로 왼쪽이 마사유키의 방이야. 밖에는 슬로프를 달아서 이 창문을 통해 휠체어로 직접 방에 들어갈 수 있어. 그 옆은 맹장지 문을 단 다다미방인데, 여기를 아빠 엄마의 침실로 하면 밤에도 금방 부를 수 있으니까 마사유키도 안심할 수 있겠지. 

현관에서 오른쪽은 거실 겸 다이닝룸이야. 바라던 대로 아예 경계를 없애고 넓게 만들었지. 그런데 거실에 있는 다다미 부분은 수납식 장지문을 설치할 거라서 거기만 따로 구분해서 사용할 수도 있어. 

주방에는 시스템키친을 맞추고 식기장도 전부 새로 설치할 거라서 지금 것은 필요 없어지지. 욕실은 여기야. 화장실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넓어서 휠체어로도 편하게 들어갈 수 있어. 화장실과 욕실에는 손잡이도 설치할 거야. 

2층은 자매들 각자의 방이야. 워크인 클로젯도 있어서 옷이라면 얼마든지 여기에 넣었다가 저기에 걸었다가 할 수 있어. 하하하.”

가족 모두가 완성된 도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당숙도 만족스러우신 듯했다. 

일손이 빠르신 당숙은 바로 도면에 맞춰 목재도 준비하셨다. 그리고 기초공사를 시작하려던 어느 날,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그건 바로 땅을 물려주시겠다던 친할아버지였다. 땅 부자였던 할아버지는 시골의 자택 주변으로 논이며 밭이며 야산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본가보다 아래쪽에 있는 밭을 차남인 아빠가 물려받아 우리는 거기에 집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장남보다 먼저 본가 땅에 집을 지어선 안되지.”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이대로 잠자코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주말에는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께 반론을 펼치려 몰려갔다. 씩씩거리며 기세등등한 엄마와 달리, 평화주의자인 아빠는 가족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전에는 그 땅을 아무 때나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엄마가 의견을 말하자 할머니는 “시아버지께 따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당장이라도 고부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토론 끝에 감정이 북받친 언니가 오빠를 슬쩍 보더니,
“빨리 지어야 한단 말이야! 오빠를 위한 집인데 그 전에 오빠가 죽으면 어떡해! 엉엉.”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늘 침착했던 엄마도 이번에는 “오빠는 죽지 않아.”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족회의는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지만, 결국 할아버지 할머니의 결심은 완고했다. 어쩔 수 없이 꿈에 그리던 우리 집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재상을 하시는 일손이 빠른 당숙이 항의를 하셨다.
“벌써 목재도 다 잘라놨는데 무르면 곤란하다구.”당숙과도 아빠와도 친하게 지내던 동창생들까지 아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집 짓기 계획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엔 아예 만들어 놓은 도면에 맞는 땅을 찾기로 했다.

그 후로 엄마와 나는 시간만 나면 이곳저곳으로 후보지를 보러 다녔다. “여긴 모래 먼지가 전부 집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아.” “햇볕 드는 게 영 시원찮네.” “이쪽 땅은 지반이 별로 좋지 않은가봐…” 

그러다가 겨우 발견한 운명의 땅은 이시즈카의 외가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였다. 200평 정도 되는 땅은 이미 완성된 남향의 도면에도 딱 들어맞았고 주차장과 텃밭을 가꿀 공간도 충분했다. 

이렇게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벽에 몇 번이고 부딪혔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 모두에게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집이 완성되었다. 음이온으로 둘러싸인 나무 향기, 상쾌한 스파이스를 더해주는 등심초 향기, 거실 구석구석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든든한 버팀목 기둥과 남성미가 느껴지는 대들보, 가지런히 배치된 시스템키친까지. 어느 방에서든 아늑한 여유가 느껴졌다. 미토까지는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아침에는 아빠가 출근하면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지역의 복지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일주일에 두 번은 요양보호사님이 오빠의 목욕을 도우러 오셨다. 

vol. 8 오빠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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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언니를 따라 미토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전통 있는 여고라서 교복은 촌스럽기로 유명했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그 교복을 동경해 왔다. 아슬아슬하게 팬티가 안보이는 위치까지 치마를 올려 벨트로 고정하고 허리춤을 접는다. 그리고 위에는 헐렁한 랄프로렌 스웨터를 입어 치마의 주름을 정리한다. 로퍼에 루즈삭스를 신고 그 끝을 다리가 가장 가늘어 보이는 포인트까지 올린 뒤 안에는 풀을 발라 고정한다. 전부 통틀어서 루즈삭스라고 불러도 그 발상지는 미토였던 만큼, 길이나 소재, 볼륨감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일반적인 루즈삭스에서 슈퍼 루즈로, 그 뒤엔 감색 루즈삭스 유행이 도래했고 졸업 전에는 감색 하이삭스로 정착되었다. 가방은 중학교 때의 보스턴백을 어깨에 메고 걷는 것이 인기였다. 모두가 너무나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다녀서, 나는 랄프로렌 대신 라코스테를 입었고, 로퍼 대신 끈 달린 가죽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악센트를 주기 위해 화려한 백팩을 메는 코디를 고집했다. 

남학생이 없는 교내는 여자애들의 낙원이었다. 날이 더워지면 브래지어가 보이기 직전까지 교복 셔츠의 단추를 푸르고, 또 날이 추워지면 짧은 치마 안에 반바지를 입은 뒤 지퍼가 달린 저지를 걸쳤다. 선생님들은 그걸 보고 병마용 스타일이라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런 모습이 여고 시절의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문화제는 남학생이 여고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찬스이다. 그때는 근처의 남고 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저 사람 괜찮지 않아?”
“응! 내 스타일인데?”
“저 사람이 케이 오빠래!”
“진짜? 저렇게 멋있는 오빠가 있었다고? 완전 부럽다!”

케이는 “아냐, 안 그래”라고 겸연쩍은 듯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자기 오빠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멋진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것보다도 질투가 났다.

이 학교에서 나한테 오빠가 있다는 걸 아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만약 우리 오빠가 병을 앓지 않고 다른 인생을 살았더라면 키는 얼마만큼 크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땅딸보 가족이니까 큰 키는 기대할 수 없었겠지만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혹시나 그럴 수도 있다. 분명 잘생긴 얼굴에 인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받아온 치료나 약 때문에 골격도 장기도 오빠의 원래 생김새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그래도 나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말 멋있었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고교 시절의 클럽 활동은 중학교에 이어서 배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선배들이 전통에 전통을 쌓아온 이 배구부에는 누가 정했는지도 알 수 없는 갖가지 규칙들이 존재했다. “이 벤치는 후배들이 손대선 안돼.” “선배가 보이면 배구부만의 방식으로 인사해야 돼.” “선배가 웃옷을 벗으면 바로 받아서 개어드려야 해.” 게다가 이 옷을 개는 방법조차도 세세한 방식이 있었다. 

3학년 선배들은 1학년인 우리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이 없었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멋진 선배를 비롯해 언제나 다정다감한 선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드는 선배 등 존경하는 선배들이 많았다. 하지만 2학년 서배들은 언제나 우리들을 감시하며 건수만 생겼다하면 곧바로 훈계 타임을 시작했다. 

고문 선생님은 파이팅 넘치는 스포츠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의 남자 교사였는데, 배구 경력도 없을뿐더러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며 압박해오곤 했다. 예를 들어 리시브 연습 때는, “선생님 부탁합니다.”라고 빠르게 말하며 선생님의 손바닥 위로 공을 하나하나 양손으로 놓아야 하는 ‘볼 전달’이라는 역할이 있다. 이때 서로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바로 가까이에 있더라도 자비 없이 얼굴로 공이 날아왔다. 작년에 물의를 일으켰던 체벌 문제쯤은 개의치 않던 시절이었다. 연습 중에는 하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며, 야구 훈련을 흉내 낸 ‘리시브 천 번 받기’와 같은 지옥 훈련을 시작한다. 물론 늘 냉정하다고 평가받았던 나는 이 훈련의 표적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3년간 배구부를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했던 동급생 12명 덕분이었다. 다 함께 선배들이나 고문 선생님께 소소한 반항을 하고,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맥도날드에서 꺼진 배를 채우면 다시 새로운 내일이 다가왔다. 지옥 같은 합숙 훈련도 싫다 싫다 말하면서도 모두 하나가 되어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상한 규칙 같은 것도 없애버리고 선후배 관계도 더욱 돈독해졌다. 나를 포함한 13명은 한 명도 그만두는 일 없이 3년간 끝까지 버텼다.

배구부를 끝까지 해낼 수 있던 이유를 한 가지 더 들자면 그건 바로 오빠 방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오빠의 방은 현관을 열고 바로 왼쪽에 있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늘 맨 먼저 오빠 방을 살피러 갔다. 오빠는 침대에 누워 다리를 꼰채 애독서였던 월간 만화 코로코로코믹을 읽고 있거나, 휠체어에 앉아 야구 중계를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었던 오빠는 야간 경기가 있을 때면 메가폰을 들고 TV 앞으로 가서 응원을 했다. 나가시마 감독을 필두로 3번 마츠이, 4번 키요하라, 5번 다카하시로 구성된 라인업은 누가 봐도 호화 군단이었다. 깔끔하게 자기 몫을 해내는 히토시와 카와이 그리고 얄밉도록 몰아붙이는 모토키, 안심할 수 있는 무라타, 이때다 싶은 한 방이 기대되는 키요하라로 착실히 점수를 뽑는다. 투수로는 외국인 용병 갈베스, 베테랑 선수인 쿠와타, 사이토 그리고 신인 우에하라까지 골든 멤버들을 갖추고 있었다. 함께 야구를 보며 응원할 때도 있는가 하면, “글레이 콘서트가 세계 기록을 세웠대!”라던가 “이케부쿠로에서 묻지마 살인 사건이 일어났대!”라며 오빠한테 방송가를 뒤흔든 뉴스를 듣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오늘은 뭐 했어?”라고 물으면 “그냥 있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오빠 비듬 장난 아니야!”라고 놀리면, 질색하는 나에게 일부러 비듬투성이의 머리를 부비려고 다가온다.
평범한 이 방에는 배구부의 고된 연습이나 엄격한 선배들과 옥신각신했던 일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떤 고민이라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어주는, 바깥 세상과 분리된 안심할 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 되면, 2층에 있는 내방에서는 계단 바로 아래 방에서 새근새근하며 잠든 오빠의 호흡이 들려온다. 잠시 귀를 기울여 상태를 확인하곤 하는데, 결국은 뛰어 내려가 흡인기로 향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빠는 눈을 뜨고, “고마워.”라고 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잠에 취한 채 흡인을 끝내고 그 후에는 언제나 평온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오빠한테 있어서는 호흡기 속 가래가 굳어버리는 일이 가장 위협적인 일이기에, 평온해진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면 나는 좀 더 일찍 2층에서 내려가면 좋았을 걸 하고 매번 후회했다. 그리고 착한 일을 한 나 자신에게도 칭찬을 해주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그런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오빠는 계속된 미열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입원해서도 열은 더 올라 체온계는 두 시간이나 42도에서 머물러 있었다. 물론 역시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들어가서 놀라지 말고.”
면회에 앞서 엄마가 언니와 내게 당부했다.

오랜만에 보는 오빠의 모습은, 보고 있는 쪽도 마음이 아파 괴로울 정도로 공허한 눈빛에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2주나 이런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급히 오빠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저녁 6시가 되자 병실 앞으로 저녁 식사를 담은 배식차가 도착했고, 그 안의 트레이 위에는 환자에게 배정된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밥, 된장국, 생선조림, 시금치 무침, 과일 샐러드. 형편없진 않았지만, 플라스틱 용기가 이게 바로 병원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공허한 눈빛을 한 오빠가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연녹색 트레이 위에 놓인 오빠 이름을 발견해 일단 침대까지 가져왔다. 

오빠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끝에 앉았고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옆에 앉아 버팀목이 되었다. 손은 떨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신 밥을 떠서 한술 먹이려고 했던 그때였다. 

“이건 내가 할 거야! 혼자 먹지도 못하면 그땐 정말 끝이라구!”
라며 믿기지 않는 힘으로 나를 밀쳐냈다.

오빠는 이미 완력 조절 기능이 마비되어, 나를 진심으로 밀치려고 했던 건지 슬쩍 민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다.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움푹 패인 두 눈은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게는 단지 도우려고 했던 일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가만히 보고 있던 엄마도 놀란 눈치였지만, 오빠는 스스로 먹을 수 있는 걸 생명력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줬다. 혼자서 제대로 먹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레벨이었지만, 그 모습은 ‘집념'이라는 단어 그 자체였다. 


오빠가 만족스럽게 저녁 식사를 마쳤을 무렵, 엄마는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사실은 선생님께서 두 번째 골수이식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네.”

엄마는 다시 공여자가 되어야 할 내 반응을 걱정하는 듯 했지만, 나는 물론 흔쾌히 승낙했다. 내 골수를 이식해 나을 수만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오빠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나는 배구부 주장을 찾아갔다.
“있잖아, 우리 오빠 아프다고 전에 말한 적 있는 거 같은데, 기억나?
지금 너무 쇠약해졌는데… 그래서 골수이식을 해야 하나 봐.”
“골수이식이 뭐 하는 건데…”
“간단히 말하면 내가 공여자가 돼서 내 척추에 있는 척수액을 오빠한테 이식하는 거야. 유치원 때도 한번 해봤는데, 또 해야 할지도 몰라. 그래서 더이상 배구부는 못 할 거 같아…”
당당히 배구부를 쉴 수 있는 구실이 생겨 기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버린 나 자신에게 놀랐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주장도,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개에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하지만 결국 두 번째 골수이식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식을 한들 이번에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정말로 골수이식이 필요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후, 오빠는 서서히 회복되어 다시 우리 집에는 평범한 오빠의 방이 되돌아왔다.

vol. 9 불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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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가고 싶은 길을 찾아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집에서 나와 독립을 했고 그 이듬해에 나는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대학에서 사회 복지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발랄한 청춘의 대학 생활을 꿈꾸며 도쿄로 진학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때때로 병간호로 인한 스트레스를 비추던 엄마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 먼저 운전면허를 따서 오빠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가고 싶다는 마음속 계획을 세우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대학생활이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즐거운 나날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같이 스포츠 근성 가득한 배구부 활동으로 인연이 없었던 연애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동아리 모임도 대학교에서는 전부 가능했다. 

나는 신물이 날 정도로 계속해온 배구부를 졸업하고, 이제 뭔가 다른 스포츠도 시작해보고 싶었다. 적당하게 땀을 흘릴 수 있을 정도의 동아리 말이다. 대학에서는 테니스 하나만 하더라도 테니스부, 테니스 애호가 모임, 테니스 동호회 같이 테니스에 대한 열정도 다를 뿐더러 술자리 빈도수 같은 것도 저마다 각각 색깔이 달랐다. 그중에서는 테니스라는 이름만 빌리고 거의 회식 위주로 돌아가는 곳도 있었다.

라크로스나 농구 같은 동아리를 몇 군데를 둘러보다가, 어쩐지 내 마음이 끌린 곳은 농구 동호회였다. 농구 연습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있었고, 연습이 끝나면 회식도 있어서 그럭저럭 적당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우리 배구부 옆에서 항상 농구부가 연습을 하곤 했는데, 어쩐지 촌스러운 배구부와 대조적이었던 농구부에 대해 약간의 동경하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기에 나는 농구 동호회에 가입하기로 했다. 

농구 동호회 연습에 참가하면, 대걸레질 같은 것은 1학년들이 자발적으로 해주길 바라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엄격한 위계질서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가 있는 선배들은 1학년들을 연습장까지 태워주기도 하고, 연습이 끝나면 선배들이 술을 사주기도 했다. 취업 활동을 하다가 가끔씩 얼굴을 비추는 4학년 선배들은 범접할 수 없는 어른처럼 보였다. 오빠도 원래대로라면 이 선배들과 같은 학년이었을 것이다. 

몇 차례 선배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 나는 4학년 선배 중 한 명과 사귀게 되었다. 

“내 생일은 5월 30일이야. ‘쓰레기 없는 날'. 외우기 쉽지?”
“쓰레기 없는 날이었구나. 까먹지 않을게요.”


대학의 긴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나는 문득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요양보호사 3급 강좌'라는 안내문에 시선이 멈췄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지역 복지 세미나는 졸업하고 나서도 어떤 자격증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 나 이 자격증 한번 따볼까?”
따로 시험이 없고 수업만 들으면 돼서 부담도 없을뿐더러 잔잔히 솟구쳐오르는 흥미가 나를 요양보호사 3급 강좌로 이끌었다.

요양보호사 3급 강좌 첫날, 교실에는 2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엄마 세대 혹은 그보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로, “부모님을 돌보게 되어 꼭 배워보고 싶었다.”던가 “좀 있으면 요양 시설에서 일하게 되는데 자격증을 따고 싶다.”라는 주부층이었다. 여기서는 스무 살 여대생인 나와 40대 전반의 유일한 남자 수강생만이 눈에 띄게 튀고 있었다. 

식사 돕기, 환복 돕기, 이동 돕기, 머리 감기 돕기와 같은 실습은 늘 나와 그 아저씨가 한 조가 되었다. 아저씨는 바싹 긴장했는지 음식을 먹이는 연습에서는 속도가 너무 빨라 숨이 막혔고, 침상 위에서 머리를 감길 때는 내 등까지 완전히 적셔버렸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다행히 모두가 문제 없이 3급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나는 마음 먹고 취득한 요양보호사 3급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 채 데이트, 동아리, 회식, 아르바이트, 세미나 멤버나 교수님과의 활동 같은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꿈꿔왔던 오빠와의 시간들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집에 돌아가 오빠한테 “오늘은 뭐 했어?”라고 물으면, 여전히 “그냥 있었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루 종일 집에서만 지내는 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취업 활동에 여념이 없는 동창들과 밖에서 노는데 정신 팔린 여동생들과의 거리감에 오빠는 틀림없이 복잡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오빠한테 신경을 쓴다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 갔다. 만약 그 시절에 유튜브나 넷플릭스, 줌 같은 것이 있었다면 오빠의 일상은 좀 더 바빴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처럼 내게 오빠의 방은 무슨 고민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나는 입을 다무는 편이었다. 그건 오빠의 연애나 성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약간 보수적이기도 했던 우리 집은 성교육에 대해서도 무척 소극적이라서 농담이라도 키스나 섹스 같은 말이 화제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일반 세상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오빠였지만 평범한 남자들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일도 있었을까. 눈살을 찌푸리는 엄마를 곁눈질하며 아빠는 오빠에게 슬쩍 플레이보이 잡지를 사다 준 적도 있었다. 또 엄마는 한 번도 내게 오빠의 배설 뒷처리를 돕게 하지 않았다. 나는 모처럼 강좌에서 배운 기술을 실제로 써보고 싶었지만, 오빠의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름방학의 어느 날,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마당에서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다. 나보다 세 살 연상이었던 남자친구는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간 오빠와 같은 학년이었다. 남자친구는 이미 오빠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의 친구들도 오빠를 아무렇지 않게 대해줄 사람들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을 하고 말았다.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은근슬쩍 오빠 방의 커튼을 쳐놓은 것이다. 나의 솔직한 감정이 그런 행동으로 나온 것 같아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마당에서는 불꽃놀이 준비가 한창 무르익었고 나는 모두에게 오빠를 소개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한편 알아주길 바라는 나의 한 부분.

“우리 오빠도 같이 불꽃놀이 해도 될까?”

그들의 대답은 물론 예스였다. 하지만 실제로 오빠를 보고나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냉정할 수 있던 나도 친한 사람들의 거부반응을 본다면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언제나 츄리닝 차림이던 오빠가 약간 멋을 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입고 벗기 편하도록 엄마가 지퍼를 고쳐 달은 리폼 청바지였다.

나는 ‘좋아!’ 하며 작은 각오를 다진 뒤, 휠체어에 앉은 오빠를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때부터는 아무런 걱정도 필요 없었다. 귀여운 미소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오빠의 매력에 어느새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있었다. 불을 붙인 화약이 모두의 웃음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차례차례 솟아올랐다. 커다랗게 퍼지는 불꽃들을 바라보며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마당에 퍼진 연기가 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빠도 오랜만에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행복한 듯했다. 

오빠를 방으로 돌려보내며 나는 얼마 전 요양보호사 강습에서 배웠던 이동 돕기를 시도해봤다. 둘이 함께 호흡을 맞춰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기는 연습이다. 실습 상대였던 그 아저씨와는 달리, 굽어진 고관절 때문에 의외로 오빠를 제대로 지탱할 수 없었다. 지렛대의 원리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둘, 셋!”

결국은 기술도 뭐도 필요없이 힘으로만 휠체어에서 침대로 옮겼는데, 너무 힘이 들어간 탓에 오빠는 침대 위로 나뒹굴었고 나도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둘이서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너무나 즐거운 밤이었다. 

vol.10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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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지역 복지를 전공했지만, 고등학생 땐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빠져 외국에 대해 자연스레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발견하기만 하면 신청해서 호주, 캐나다, 방글라데시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세미나를 통해 개발도상국 지원으로 유명하신 교수님을 알게 된 덕분에 유네스코가 파견하는 팀의 일원으로서 인도에 갈 수 있는 찬스를 얻었다. 

일본 전국에서 모인 개성 넘치는 10명의 대학생이 3주 동안 인도를 방문해, 문자 교육 현장을 견학하거나 농촌에서 홈스테이를 하거나 현지 대학생들과 교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북인도에서 남인도까지 이동도 많아 체력적으로는 힘들면서도 흥분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프로그램을 마치기까지 1주일 정도 남았을 때 우리 일행은 인도 체류 기간 중 가장 교외에 자리한 농촌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한동안 고행에 가까운 인도 생활이 이어졌는데,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아그라에서 관광을 하거나, 방갈로르 시내로 나가 대학생들과 교류하는 활동에 대한 즐거움을 슬슬 알아갈 때였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프론트에서는 내 앞으로 엄마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외국에까지 일부러 전화를 걸어올 정도라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교통사고라도 당한건지, 아빠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라도 한건지, 혹시라도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건지… 이런저런 생각에 덜컥 겁이 났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곳까지 전화를 걸어 미안하구나.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빠와 고민했었는데, 만일의 경우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래서 전화를 걸었단다.”

“응 엄마… 무슨 일인데?”

“모레 오후에 오빠가 긴급 수술을 받게 되었어. 어려운 수술이라 그대로 못 만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하네. 의사 선생님이 가족 모두 모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셔서…”

그 말은 무척이나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내 귀를 통과해 가슴에 박혔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그래서… 오빤 언제까지… 살 수 있대?”

“이번 수술 결과에 달렸어. 모레 점심때까지 돌아오면 마취 들어가기 전에 오빠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반드시 돌아갈게.”

출국 전에는 전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았는데, 언젠가는 오겠지 하고 생각하던 날이 갑자기 눈앞에 닥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의 분신은 역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연약해지는 것이다. 

놀라움, 슬픔, 불안, 후회와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나는 한참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외딴 시골에서 내일모레까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팀장을 맡으신 교수님 그리고 인도인 가이드와 함께 곧바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못 미더웠던 현지인 가이드도 이때 만큼은 믿음직해 보였다. 

모레 오후부터 역으로 계산해보니 나는 지금 당장 출발해야만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한솥밥을 먹어 왔던 멤버들에게는 프로그램의 중도 하차를 선언하고 서둘러 짐을 꾸렸다. 

귀국 계획은 이러했다. 밤새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에는 국내선을 타고 인도의 주요 도시로 이동해 국제선 밤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한다. 비행은 약 9시간 걸리므로 다음 날 아침이면 나리타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나리타에서부터는 오전 중으로 이바라키에 위치한 병원에 도착할 수 있길 바라는 빠듯한 도박이었다. 

그렇게 정하고 나자 현지 청년이 선뜻 차를 내주었다. 언뜻 보기엔 어딘가 어설픈 초보 운전자였지만, 나는 그가 무사히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이셨던 세미나의 담당 교수님께서는 부팀장님께 일행들을 맡기고 직접 나와 동행해 주셨다. 보통 때라면 모두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차는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길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그 시절에는 스마트폰이나 구글맵이 없어 나는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던 청년은 영어가 통하지 않았는데, 수도 없이 유턴을 반복하는 걸 보니 영락없이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초보 운전자에겐 지나치게 무거운 임무였던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을지, 예정하던 비행기를 탈 수는 있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한밤중의 대모험이었다. 

하지만 그 청년은 겉모습과 달리 좋은 사람이었다. 오밤중이었지만 앞마당에 나와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차창을 열고 계속해서 길을 물어가며 운전했다. 

성실히 맡은 임무를 완수해준 청년 덕분에 우리는 공항이 열리기 전에 도착했다. 그를 돌려보내고 나는 교수님과 둘이서 공항 바깥 벤치에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안에서 스태프가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이 보여, 조금만 일찍 열어줘도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공항 안의 화장실을 쓰게 해달라 말했지만, 사용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 

드디어 공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예약한 비행기표의 정보가 반영되지 않았는지 탑승수속에도 무진장 애를 먹었다. 인도는 IT 선진국이라 들었는데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대응 방식에 나도 모르게 교수님과 눈을 마주쳤다. 

이윽고 국제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하자, 탑승수속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교수님은 나를 근처 호텔로 데려가 자신은 로비에서 기다릴 테니 출발시간까지 느긋하게 쉬라며 욕조에 따뜻한 물까지 채워 놓도록 부탁하셨다. 몇 주 만에 욕조에 들어가자, 나는 몸과 마음에 맺힌 응어리도 한꺼번에 녹아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교수님의 멋진 배려 덕에 모든 것을 재정비하고 일본에 귀국할 수 있었다. 

이번 인도 파견 프로그램에 내가 뽑히게 된 것은 ‘건강 체질'이라는 것이 커다란 포인트였다. 지난번 방글라데시 파견에서도 교수님과 나 이외에 다른 멤버들은 모두 한 번씩 병원 신세를 졌었다. 가령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인도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나의 건강 체질이 인정받아 이번 프로그램의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런 내가 가족의 건강 문제로 귀국하게 될 줄은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나조차도 오빠의 그 언젠가가 이런 식으로 눈앞에 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리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계속 잠을 설쳤다. 가까스로 타리타 공항에 도착한 후, 방향치였던 나는 역무원에게 끈질기게 물어물어 이바라키까지 최단 시간으로 갈 수 있는 전철로 갈아탔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할 수만 있다면 빼곡하게 들어찬 아침의 통근열차 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든채 비집고 들어갔다.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한 뒤 거기서부터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 전이었다. 미묘한 긴장감이 온몸에 퍼지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숨을 헐떡이며 수술실 앞에 다다르자 오빠는 마침 환자 이송 침대에 누워 전쟁터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늦지 않았다!!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겉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살짝 맥이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결국 끝까지 진행되지 못한채 중단되었다. 그 후에도 오빠는 겉보기엔 여전히 건강했지만, 그 수술은 응급 처치를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빠의 생명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vol.11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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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처치 수술이 있고 나서 약 2년이 흘렀다. 그 수술이 정말 필요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조차도 사라졌을 무렵, 오빠의 상태가 급변했다. 그래도 여태까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온 오빠였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과거의 무용담 중 하나가 되리라고 믿었다. 

엄마와 내가 병실에 머물며 오빠를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열흘째다. 

쓰레기 없는 날. 그날은 사귀던 남자친구의 생일이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좋아하던 인디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오빠는 좀 어떠셔?”
“그게… 별로 좋지 않아… 생일, 함께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공연 재밌게 보고 와. 모두한테 안부 전해주고.”
“그렇구나… 지금도 병원이야?”
“응. 오늘도 여기서 잘 거 같아”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주차장으로 갈게”
“나는 괜찮으니까 공연 보러 갔다 와!”
“병원에 도착하면 전화할게. 올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응… 알았어. 그럼 이따 봐.”

남자친구가 직장이 있던 요코하마에서 이곳까지 만나러 와줬던 날 밤, 치바에 살고 있던 언니도 병실에 나타났다. 

“다녀왔습니다!”

고요함이 감도는 1인실과는 동떨어진 목소리. 언니의 눈부신 미소와 활기는 적막한 공기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문자 메시지로는 어느 정도 알렸지만, 언니는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했다. 아마 나도 떨어져 살았더라면 ‘이번에도 괜찮아지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와는 정반대의 성격인 언니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저돌적으로 뛰어드는 타입이다. 152cm라는 작은 체구를 가지고는, 포기하는 사람도 많은 스포츠의 길도 승부 근성 하나로 대학 때까지 매진해 왔다. 대학생 때도 어느샌가 미국으로 캐나다로 스노보드를 배우러 가 있었다. 취직 후에는 라크로스에 매력을 느껴, 매달 어린이 라크로스 교실을 열고 있다. 가족들조차도 언니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제나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길로 돌진한다. 최근에는 출산을 위해 친정에 돌아왔다가 아빠의 텃밭 가꾸기에 영향을 받아,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더니 딸기 농가를 차리고 말았다. 나는 언니의 그런 성격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언니는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적부터 누구보다도 나를 보살펴 준 사람이기도 하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아직 초등학교 1학년 때,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폭풍우가 치던 날이었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하러 가고, 언니와 나 단둘이 집에 남겨졌다. 멀리 보이던 번개와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밖을 보고 있었는데 눈 앞의 목재 창고로 그림을 그린 듯 선명한 지그재그 모양의 벼락이 떨어졌다. 눈부신 빛과 천둥소리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우리 방은 완전히 천둥에 포위되어 지금 당장이라도 내리치겠다는 듯 위협받고 있었다. 

우르르 쾅쾅! 들어본 적도 없는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결국 우리 집에 벼락이 떨어졌고, 내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나는 큰소리쳐 울며 어서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휴대전화도 삐삐도 없던 시절,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내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때 언니는 집 전화를 들고 제2의 엄마 집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줌마, 우리를 구해줘! 데리러 와줘!”

수화기 건너편에는 지원 사격을 위해 그저 흐느껴 울던 내가 있었다. 

“아줌마도 데리러 가고 싶은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차가 없구나... 하지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고 있으면 꼭 데리러 갈 테니까!”

잠시 뒤, 제2의 엄마와의 협동 플레이로 제3의 엄마가 우리를 돌보러 와주셨다. 그때까지 나를 달래던 언니는 아줌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보다 더 크게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천둥 번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저 멀리서 번쩍번쩍 빛나는 하늘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비바람이 몰려오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는 기술도 익혔다. 기분 좋게 잠든 사이에 천둥 번개의 공습도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내가 취직을 하고 도쿄에서 자취를 시작하자, 우리 언니가 여기 와 눌러앉는 바람에 결국엔 우리 둘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꽤 그럴싸한 도시락까지 만들어주는 날도 종종 있었다. 매주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는 둘이서 외식을 했는데, 회사를 마치고 역 근처의 저렴한 야키토리집을 가곤했다. 싸지만 맛도 있고 일본 소주도 한 잔 가득 따라주는 가게는 우리 자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거기서 한껏 먹고 마신 뒤 밖으로 나오면, 편의점에 들러 2차로 먹을 디저트와 술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엔 항상 둘 다 곯아떨어지는데, 다음 날 아침이면 기억나지 않는 테이블 위의 잔해들을 보고 후회하곤 했다. 

그렇게 잘 챙겨주는 언니였지만 대학 생활은 나 이상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만끽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가족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언니는 조금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있어서 미안해.”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집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상황과는 동떨어진 밝은 표정으로 나타난 언니는 우리에게 있어서 눈부신 태양처럼 보였다. 침울해진 분위기에 리셋 버튼을 눌러, 다시 힘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것이다.

언니는 가족들 중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vol.12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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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오고부터는 나와 교대로 오빠를 간호했다. 한편 가서 좀 쉬라고 말해도 결국 엄마는 꾸벅꾸벅 졸 뿐 오빠의 곁을 떠나는 일은 없었다.

오빠는 가끔 몸을 좌우로 격렬하게 뒤흔들며 머리를 침대 맡에 부딪히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럴 때면 우리는 오빠의 어깨를 잡고 침대 위로 온 힘을 다해 눌렀다. 어디에 그런 힘을 숨겨놓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오빠는 완강히 저항했다. 

그런 살벌한 발작 중에,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와 엄마를 불러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침대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하필 이럴 때 찾아오셨다. 오늘은 마침 담당 의사가 외출 중이라 안계시고, 예전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선생님이 봐주고 계셨다. 고관절 골절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늘 거만한 말투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도 지금은 그분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복도로 불려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의사가 말하길, 뇌에 혈액이 차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한계 상황에 와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늘이 고비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위기를 극복해 온 오빠가 다시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살려주세요!”

오빠는 발작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담당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오빠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웃으며 이야기해온 과거의 무용담 뒷편에는 이렇게 젖 먹던 힘을 다해 살아남은 오빠의 모습이 있었다. 

한동안 발작을 일으켰다가, 또 어느새 평온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코끼리가 있어…” “어떤 여자가 다가와…”
환각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나는 오빠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속삭여본다.
“이미 충분히 노력했어.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아직 살고 싶어…”
오빠의 대답이 들린 것 같았다.

“알았어. 후회 없이 살다 가자. 계속 곁에 있을게.”
나는 오빠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밖에도 이번에 병 간호를 하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오빠의 다른 모습에 놀란 적도 있었다.
담당하시던 수간호사가 오빠의 상태를 체크하러 와주셨던 어느 날, 그때까지도 괴로워 보였던 오빠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워 있어도 괜찮아요.”라는 수간호사님께 “이렇게 와주셨는데 일어나야죠!”라며 일어나 앉아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격식 같은 건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오빠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는 게 무척 의외였다. 그리고 강인하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예쁜 오빠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격식 같은 건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오빠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다는 게 무척 의외였다. 그리고 강인하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예쁜 오빠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운전 조심해라.”

만약 여기서 사고라도 내버린다면 본전도 까먹는 꼴이 되겠지만, 나는 엄마의 말과는 반대로 이 시골길을 최고 속도로 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개운해지자 나는 지금 당장 오빠한테 돌아가고 싶어졌다. 어쩐지 내가 집에 돌아온 사이에 오빠가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문병을 와있던 제2의 엄마가 나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얼른 오빠한테 가봐!”

나쁜 예감은 적중했다.

집에서 가져온 세탁물을 팽개쳐두고 허겁지겁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자, 병실에서는 엄마와 언니가 오빠를 부여잡고 소리치고 있었다. 언제나 우리를 웃기던 아빠는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 말고도 의사와 간호사들로 병실 안은 분주했다. 나도 서둘러 오빠의 머리맡으로 달려가 수없이 외쳤다. 

“오빠, 죽지마!

오빠, 돌아와!

오빠, 아직 아니야!!”

오빠는 저세상으로 가는 길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계속 소리치다 보면 분명 다시 돌아와 줄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오빠를 부르고 또 불렀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한편, 우리가 마치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닐거라고도 생각했다. 


오빠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던 날이 바로 오늘 2003년 5월 31일이 되었다.


오빠를 돌봐주셨던 간호사님들도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떠난 오빠의 몸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셨다. 잠시 후 우리가 진정되었을 즈음, 이모도 달려와 주셨다. 이모는 방금 전까지 우리가 했던 것처럼 오빠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지만, 그 무렵에는 슬프다기보다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오빠를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 피어올랐다. 이제 더는 병간호를 계속하지 않도록 떠나버린 오빠의 배려심도 느껴졌다. 언젠가 생사의 갈림길에 선 오빠를 암흑 속에서 건져 내주신 분께, 이제는 슬슬 와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빠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절차를 밟는 사이, 아빠는 자동차의 핸들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있었다. 아빠의 왜건 차에도 오빠와의 추억은 가득 담겨 있다. 아직 따뜻했던 오빠의 몸을 엄마에게 기대게 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드라이브였다. 

출발하려던 찰나, 담당의가 달려왔다. 

“살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생님은 머리를 숙였다.

“아니에요. 오빠는 지금까지 선생님이 맡아주셔서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선생님을 찾았어요. 오빠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빠는 분명 지금까지 몇 차례나 거친 파도를 함께 넘어온 담당 선생님께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먼저 선수를 쳐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나는 오빠를 태운 아빠의 차를 먼저 보낸 뒤, 내 차에 몸을 싣고나자 잠시 동안 그 정적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이 몇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조금 전, 차를 이곳에 댄 순간부터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랬다. 

서서히 현실 감각과 슬픔이 굽이쳐 올라오더니, 이윽고 커다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집어 삼킬듯한 새카만 어둠 속으로 휩쓸리기 전에 나는 차에 시동을 걸어 그 파도를 떨쳐냈다. 오디오에서는 HY의 모노크로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마주친 그대의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주위가 보이지 않아
이 마음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그대 곁에서 느끼고 있을게

연애 감정이 담긴 가사조차도 오빠에 대한 마음 같이 들리며 내 가슴 속에 저며들었다.

“내 곁에 머물러줘! 좀 더 네 곁에 있게 해줘!”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묻히도록 HY 노래의 볼륨을 크게 높인채 차를 몰았다. 몇 번이나 오가며 익숙해진 이 시골길. 초록빛 가운을 휘감은 가로수는 푸른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줄기를 뻗치고 있었다. 논에는 일직선으로 바르게 심어진 풋풋한 모가 자라고 있고, 수면은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밝고 아름다운데... 

그날은 토요일로 마침 집 근처 체육관에서는 농구 동호회 사람들이 모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몇 주 전에 내가 체육관 사용을 예약해둔 것이었다. 정작 예약한 본인이 없어도 문제없이 체육관 문을 열어주었지만, 웬일인지 나는 그곳으로 향하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눈물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지만, 걱정이나 동정을 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 문득 평범한 일상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잠시 현실에서 도피한 뒤 집으로 돌아가자, 먼저 도착해있던 오빠는 침대 위에 똑바로 누워있었다. 굽어진 고관절을 바르게 펴려고 해도 더는 아플 일도 없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눈을 뜨는 일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려주는 일도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없다. 나는 이제는 화낼 일도 없는 오빠를 꼭 끌어안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 고생했어, 고마워 오빠.

vol. 13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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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엄마가 거실에서 장례식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에 나는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는 역시 평온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남자친구와 동호회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와주었다. 그때 나는 슬픔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듯해서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장의사도 나타나 “서둘러 절차에 대해서…”라며 장례식에 관한 준비를 설명하고 있었다. 관이며 꽃이며 선택 사항이 너무 많아서 유가족이 슬픔에 잠길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가능한 일이라면 “지금은 좀 내버려 두시고 10일 후에 다시 와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쪽에서 권유하는 대로 장례 의식은 마련되었고 응접실에는 문상객을 맞을 준비가 차곡차곡 갖춰져 갔다. 

이번엔 마을의 이장님께서 동네분들을 데리고 와주셨다. 이시즈카에서는 마을의 주민조합에서 장례식을 주관하는 것이 예로부터의 관습이라고 한다. 이것저것 정하고 나니, 앞으로 유가족은 괜시리 나서면 안된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여러 사람들이 교대로 우리 집을 오가며, 차 대접부터 식의 운영까지 도와주셨다. 

이시즈카의 주민조합은 상당히 고령화가 진행되어, 우리 가족이 이사를 왔을 땐 가장 젊은축에 속했다. 동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매일 할 일 없이 무료하게 우리 집에 와계시는 것은 솔직히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분들이“찻잔은 어디에 있나요?” “다과는 있습니까?”라고 물어올 때마다 유가족은 지시만 내려야 한다.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한편, 나이 드신 분들께 일을 시키는 것이 죄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와주시는 분들의 식사를 위해 매번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도 오히려 번거로웠다. 전통, 관습이란 보통 그런 것이었다. 

장례식을 준비해보니 아빠를 비롯해 “가족장이 더 나아.”라고 했던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하지만 오빠는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배웅받는 것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영정사진으로는 동급생이었던 스시집 아들과 둘이서 찍은 사진을 쓰기로 했다. 스시집 아들은 오빠와 이름도 똑같은 ‘마사유키’로, 유치원 때부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오빠를 보러 와줬다.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닌 따로 또 같이의 남자 아이들의 우정이란 옆에서 보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이어졌다. 사진 속 오빠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꾸미지 않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남자들끼리 약간 폼을 잡은 늠름함조차 감도는 멋진 사진이었다. 


장례식 당일이 되었다. 불경을 읊어주신 스님은 아빠의 동급생이었다. 친척들, 제2 제3의 엄마들, 오빠의 친구들, 첫사랑이었던 시노부짱, 유치원 원장 선생님, 학교 선생님들, 스시집 일가, 오빠의 종이접기 팬들, 그리고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의 아주머니들과 같이 많은 분들이 오빠를 떠나보내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주셨다. 

유치원 원장 선생님은 보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엄마를 부둥켜안았다.
“문득 오랜만에 집에 걸어놓은 마사유키의 종이접기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부고를 전해들은 거야… 꼭 마사유키가 알려준 것 같았어.”

1층은 응접실에도 거실에도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2층에 있던 자매의 방이 가족들의 쉼터가 되었다. 아빠는 짬이 나면 틈틈이 담배를 피우러 올라오셨다.
“아빠, 괜찮아? 물 한 잔 마시고 좀 쉬면 어때요?”
“아니야, 괜찮다"
“상주 인사도 괜찮겠어?”
“아, 그렇구나. 좀 생각해 놓아야겠네”
담배를 쥐었던 손에 볼펜을 끼우고 인사말을 적어보려고 했을 때, 1층에서 누군가 아빠를 불렀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아빠가 2층으로 올라오면 또 누군가 불러서 인사문을 전혀 완성할 수 없었다.

“아빠, 인사문은 내가 대신 쓸게요.” 보다 못한 언니가 직접 나섰다.
“그럴까. 그럼 안심할 수 있지.”
언제나 모임을 주도하던 아빠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특기였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듯 했다. 


“오늘은 마사유키를 위해 모여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고인도 여러분께 배웅을 받아 기뻐하리라 생각합니다. 생전에 신세를 졌던 여러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사유키는 세 살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스무살까지 살 수 없을 거라고 선고받았었는데…
그런 마사유키는...24년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아무쪼록 마사유키가 이 세상에서 함께 했던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아빠는 주름이 깊게 팬 울먹이는 얼굴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배우 같은 연설에 많은 조문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는데, 나는 아빠의 모습이 오랜만에 멋있어 보였다. 

장례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손님으로 가득 찼던 응접실에 하나둘씩 빈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엄마를 둘러싼 제2 제3의 엄마들이었다.

현관까지 배웅을 나간 내게 모두가 입을 모아 “엄마를 잘 부탁한다.”라며 돌아갔다.

“네, 그럼요.”

나는 “나도 괴로워요.”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버팀목이 되어주던 남자친구나 친구들에게조차 위로받기보다는 그저 혼자 남아 울고 싶었다. 

vol.14 오빠가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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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서 나는 처음으로 집에서 나와 도쿄로 떠나기로 했다. 간호 및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둘러싸여 있던 지금까지의 환경에서 벗어나, 반짝반짝 빛나는 직장인으로서 날개를 펼칠 일을 꿈꿔 왔다.

하지만 결국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이끌리듯이 요양 복지의 길로 방향을 잡는 내가 있었다. 오빠처럼 장애가 있다해도, 그 누구도 밖으로 나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 부풀어 갔다. 

취업 후에는 사회의 모진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가라앉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매일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3년 째에 들어서며 드디어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을 때는, 참고 견디면 복이 온다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나는, 고령자 시설에 입소한 분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반짝반짝 플랜”을 맡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괜찮은 이름이 있었을텐데 하며 부끄러워지지만, 당시에는 그게 안성맞춤의 네이밍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누워만 계시는 고령자라도, 누구라도 꿈은 있다. 그 꿈을 이루어드려 본인과 가족 그리고 그걸 후원하는 스탭들조차도 감동을 받는다는 일석삼조의 프로젝트였다. 

나는 95세의 신사가 염원하던 댄스파티에 참석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꿈이란 어떤 치료나 재활보다도 살아갈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배웠다. 오빠에게 있어서 살아갈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 후로도 83세의 치매 환자와는 다카오산을 올라가고, 92세의 고령자는 가족과 함께 가마쿠라 여행을 가고, 100세라도 무대에서 주역이 될 수 있는 콘서트를 여는 등 수많은 꿈들이 실현되었다. 이건 진정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한편 오빠한테 해주지 못한 많은 일들을 다른 이들을 통해 보상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프로젝트가 전국 32곳의 시설에 정착되어 궤도에 올랐을 무렵, 나는 90세의 멋진 노부부를 알게 되었다. 

“다시금 이루고 싶은 꿈을 들려주시겠어요?”
“꿈이라. 그러고 보니 나는 다시 한번 외국으로 여행을 가고 싶군.”

젊은 시절에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며 사업을 일궈왔던 신사는, 이제 휠체어를 탄 부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여행은 모두에게 신세를 지면 어떻게든 갈 수야 있겠지만, 이 몸으로는 이제 엉뚱한 도전 같은 건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자네도 뭐든지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 계속해서 여행을 떠나는 게 좋아.”

돈과 지위와 명예마저도 가진 분들이 인생의 마지막 장에 와서 가장 하고 싶은 일. 그건 바로 지금 내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신사분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나는 세계를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언젠가는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넓은 세상, 오빠도 분명 가보고 싶었을 바깥 세상을 1년에 걸쳐 돌아보기로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요양 보호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내가, 이때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등 떠민 것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이다. 이때 떠난 세계 일주를 계기로 내 인생의 시나리오는 전혀 새로운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7번의 기일이 지난 뒤, 2011년에 토호쿠 지방에서는 기록적인 대재해가 발생했다. 나는 지금도 피해지역 아이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거기서 만난 많은 아이들에게서 재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가 겪은 일에 대해 말했다.” “모두 고생하는 가운데 나만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라며 흐느끼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오빠의 장례식 이후, 가족들 앞에서 우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그 아이들이 겪은 일은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

오빠를 잃고 나서 처음 5년 동안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모호한 경계 가운데 거의 매일 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나서 5년 동안은 오빠를 잊어버리는 게 두려웠다. 나의 분신이기도 한 오빠는 지금도 나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어 내가 몸이 안좋은 날이면 반드시 꿈에 나타난다. 

1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오빠와 함께했던 날들은 내 안에 따뜻한 무언가를 확실하게 심어 놓았다.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오빠의 활짝 웃는 미소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얼굴, 평온히 잠든 얼굴과 오빠와 함께했던 몇 가지 추억이다. 오빠가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 했는지는 이제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매년 찾아오는 5월 31일, 나는 꼭 스시를 먹는다.

The End

뒷 이야기

이 소설은 오빠와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을 둘러싼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이다.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오빠와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빠가 떠난 후 처음 5년 동안은 감정이 너무나 복받쳐 올라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그 후 5년은 여전히 추억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써야 좋을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17번째 기일을 맞은 지금, 아련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오빠와의 추억을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 5월이 되었지만,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한채 stay home 상태에 있어야만 했던 내게, 이러한 시간적 여유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것 같았다. 이동 제한령이 내려진 세부에 있는 동안, 나는 매일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빛 속을 산책하며, 다음 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전부 써 내려간 후에는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는 가운데 드디어 마지막 장까지 공개할 수 있었다. 특히 매번 적절한 어드바이스와 멋진 비주얼을 제작해 주신 Isoo님께는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한국어로 번역 해 준 Claire Kim 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스토리를 차곡차곡 되돌아보면, 각각의 장면에서 우리 가족 모두는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서로가 서로를 도왔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 하나하나가 좋든 싫든 지금의 내 성격에 배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이야기는 유년기부터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꿉친구, 초중고 대학 시절의 동급생, 선배와 후배, 직장인이 되어 만난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업무적으로만 알고 지내던 분들로부터도 기쁘게도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읽어주신 분들께는 어릴 적부터 나를 지켜봐 온 친척 같은 느낌도 들었다. 따뜻하게 감싸주는 안심감이라고 할까…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느낌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음에 직접 만나게 될 때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질 것 같아 무척 기대된다. 

보내주신 메시지 대부분이 감사하게도 그 당시의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알려주셨다. 또한, 주변에 있는 분들이 실제로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병에 걸린 아이를 둔 부모님이나 의료 복지 관계자들로부터 매번 귀중한 코멘트를 받았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싸우고 있는 분들의 힘이 될 수 있다면 나 또한 기쁠 것이다. 

읽어주신 분들과 이 이야기에서 다룬 테마를 바탕으로 몇 차례 대담을 가진 적이 있다.
https://note.com/satokotsuchi/n/nf27c598237ae?magazine_key=mbf465342699c
https://note.com/satokotsuchi/n/nc64d6352ecac?magazine_key=mbf465342699c
https://note.com/satokotsuchi/n/n9c802e17b184?magazine_key=mbf465342699c

 
오랜만에 연락을 해준 사람들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고민 상담까지, 소설을 통해 다시 여러 사람들과 연결되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생에 있어서 멋진 스토리를 갖고 있고, 나는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출판과 영화 제작을 목표로 한 도전은 아직 스타트라인에 서 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계 일주를 담은 소설 ‘세계 교실'과 또 다른 테마에 관해서도 써 가고 싶다. 


스무 살까지 밖에 살 수 없다고 선고받은 오빠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24세의 생애를 최선을 다해 살아냈다. 그럼에도 오빠는 좀 더 오래 살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의료기술로도 여전히 몇백만 명의 사람들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바란다. 아무리 짧은 생명이라도 굵게 욕심을 내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헌신적인 서포트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부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세상을 누리고 싶은 수많은 생명이 구해지길 바라며. 

프로필


난치병과 싸우는 가족의 막내로 태어나 약간 이색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인연이 닿아 방글라데시 및 인도를 다녀와 더욱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20대의 막바지에는 세계 일주를 떠났습니다. 프리랜서, 노마드 워커, 듀얼 라이프를 거쳐 2015년에는 해외 이주를 단행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고 하지만, 나의 인생은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로 가득합니다.

생활 거점이었던 세부에서는 2020년 3월부터 엄격한 이동 제한령이 공표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행 연장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언젠가는 꼭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은 “매년 5월 31일, 나는 항상 스시를 먹는다.” https://note.com/satokotsuchi/m/meaeb9b9b375c
스무 살까지 밖에 살 수 없다고 선고받은 오빠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유년기에서 출발하여 성장 순으로 연재했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 숨쉬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작품은 <세계 교실 ~지구 일주 버추얼 모험~>
https://note.com/satokotsuchi/m/mc379f012c3fb
2011부터 12년까지, 해외에 있으면서 일본의 학교와 온라인으로 연결된 라이브 수업 ‘세계 교실’을 진행하면서 약 40개국을 방문하는 세계일주를 떠났습니다. 외국에 갈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세계 교실’을 함께 진행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버추얼 탐험기로서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곳곳의 마을을 달리면서 여행하는 ‘타비 런(旅Run)’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고 싶습니다.
세계 교실 & 타비 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해 주세요.
 

소설의 좋아요 및 공유는 큰 힘이 됩니다♪ 문의 사항이나 댓글도 기다리고 있어요♫ 읽어주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삽화, 영상, 음악, 번역 등의 협업도 대환영이에요! 가벼운 마음으로 메시지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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