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판]아다치의 머리는, 어째서 털이 북실북실한 생물처럼 보였는가?

※소설판・아니메 판『아다치와 시마무라』(入間人間) 의 스포일러(소설판 8권까지)를 포함합니다.

 아다치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과 같이 보면 아름다운 머리도 단독으로 내려다보니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털이 북실북실한 생물처럼 보인다고 할까. 내 머리도 이렇게 보면 비슷할까?

이루마 히토마『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p.42(학산문화사 단행본 기준)

 이건 소설판 제 1권 38쪽에 있는 1절입니다.
 애니메 판 제 1화에서도 같은 문구가 등장합니다.

 자전거의 뒤에서 아다치의 머리를 내려다 볼 때, 얼굴과 세트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던 것도 털이 북실북실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내 머리도 이렇게 보면 비슷할까? 이상한 하루였다.

TVa『아다치와 시마무라』제1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이상한 문구가 아닐지요.  이 표현과 만났을 때, 저는 상당히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소설판에서는 이 1절이 하나의 단락으로 되어있습니다만, 이 단락을 지우고 읽더라도 전후의 단락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오히려 이 단락을 삭제하는 쪽이 이야기의 템포가 좋아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 note의 기사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이 묘사(이하, '털북숭이 묘사')는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털북숭이 묘사' 의 고찰을 통해서,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이야기 전체에 일관적인 해석을 더하는 것입니다.

 나의 가설은 이렇습니다.


가설①

'털북숭이 묘사'는 도달할 수 없는 '타자'가 실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설②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두 명의 '멜랑콜리스트'가 그러한 '타자'와 만나서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다.


 키워드 '타자'와 '멜랑콜리'의 두 가지
입니다.

 아래에서는 먼저 '털북숭이 묘사'의 의미를 고찰합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키워드인 '타자'가 『아다치와 시마무라』에서 어떤 존재로 그려지는지 검토합니다.

 '털북숭이 묘사'에 대해 생각한 뒤에는, 두 번째 키워드 '멜랑콜리'에 대해서 논합니다. '멜랑콜리'의 의미를 밝힌 뒤에 실제로 『아다치와 시마무라』로부터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아다치와 시마무라 두 사람이 '멜랑콜리스트'임을 확인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키워드가 맺는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춥니다. '타자'가 '멜랑콜리'를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는가, 그 때까지 논해온 '타자'라는 존재의 특별한 성질을 짚어가면서 설명합니다.


목차

  1. '털북숭이 묘사'의 의미를 생각한다.

  2. '멜랑콜리'란 무엇인가

  3. 아다치와 시마무라, 어떻게 하여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했는가

「털복숭이 묘사」의 의미를 생각한다.


 여기서, 가설 ①의 설명에 들어갑니다. 반복하자면, 가설 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설①
'털복숭이 묘사'는 도달할 수 없는 '타자'가 실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설에 공감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논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아다치와 시마무라』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만, 이하의 기술은 모두 '털복숭이 묘사'를 이해하기, 나아가 『아다치와 시마무라』를 이해하기로 이어집니다.


 첫번째는 '타자'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타자' 란 '다른 이' 즉 자기 이외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얘기지요. 하지만, 이 말에 따옴표가 쳐져 있는 이유는, 타자란 존재가 갖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타자의 최대 특징이란, 그 내면(혹은 의식)에 직접 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타자가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생각하는지는, 본인 이외에는 경험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쪽도 들어보면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친구가 '배가 아프다'고 괴로움을 호소한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자신이 복통으로 괴로웠다 경험을 기억해 내서 '아아, 확실히 아프고 괴로워 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때, 당신이 얼마나 선명하게 복통의 고통을 상상하더라도, 그것은 상상일 뿐이며, 그 '욱신욱신 아파오는 느낌'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상기하는 것으로 타자의 내면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에 직접 접촉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자기 이외의 인간에게는, 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던가, '자기에게 붉게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는 푸르게 보여서 그것을 "붉다"고 부를 뿐일지도 모른다'하는 상상을 해봤던 분도 많지 않을까요?(전자는 '철학적 좀비', 후자는 '역전 스펙트럼'이라 불리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타자'의 의식이 본인 외의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액세스 불가능하다는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제가 "타자"라는 말을 할 때 의도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가까이 있는 듯하지만 실은 격리되어 있어, 포착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이러한 "타자"의 개념이『아다치와 시마무라』에서 몇 번이고 나타납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진행하도록 하죠. 

 다음은, "실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얼마나 철학적인 울림입니까. 여기서부터 논의는 『새로운 철학의 교과서 - 현대 실재론 입문(新しい哲学の教科書 現代実在論入門)』(이와우치 쇼타로, 2019)(이하,『철학입문』)을 참조해가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제가 이번 기사를 쓰고자 생각했던 동기의 큰 부분은 이 책 『철학입문』에 있습니다.  현대의 멜랑콜리(후술)에 대해서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딱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소박하게 생각해보면, 내 몸 주변의 세계란, 나에게 관계 없이 현실에 존재하는 듯합니다. 나의 눈 앞에 있는 키보드도, 마우스도, 옆에 놓여있는 컵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공간의 일부를 점하며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듯이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건 데카르트적인 세계관입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은 공간의 일부를 점하는 것에 있다.

『철학입문』—— p.91

 위와 같은 주장이 타당하게 느껴집니다만, 하나의 커다란 개선점을 포함합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라는 부분입니다.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 이를 테면 니체나 윅스퀼, 하이데거는 세계는 "내"가 갖는 특정한 관심에 의해 나타난다, 고 생각했습니다.(『철학입문』, pp.41, 92-94)。

 "세계는 '나의 관심에 의해 나타난다"라는 것은, 이런 류의 논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쉽게 납득할 것입니다만 처음 보는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위와 같은 사상은 "사물이 단지 존재한다"는 일상적인 감각과는 꽤 다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저도 설명해보겠습니다만,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부디 『철학입문』을 입수해주시기 바랍니다.

 "세계가 '나'의 관심에 의해 나타난다'는 건,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들의 의식(=관심)은 보통 '얼마나 쾌적하게 생활할까' 라는 점에 자연스럽게 향하고 있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 의자에 앉아서 이 note의 포스팅을 적고 있습니다만, "의자"라는 사물은 단지 거기에 공간적인 넓이를 갖고 있다기보다, 내게 있어 앉기 위한 것"으로서" 그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의자뿐만 아니라 책상도, PC도, 키보드도, 컵도, 내게 있어 쾌적한 생활을 보내기 위한 '도구로서' 거기에 있습니다.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을까요. 세계를, "나"의 '신경씀'으로 나타나는 '도구존재'로 포착한 위와 같은 세계관은 하이데거에 의한 것입니다. (『철학입문』, pp.92-94)

 사물이 '특정한 관심에 의해 나타난다'고 한다면, 관심의 방향에 의해 세계가 나타나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철학입문』에서 이와우치 씨는, 사람을 얼굴을 예로 들어서 이를 교묘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p.95) 저도, 또한 많은 분들도 경험해봤을 것이란 현상을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글자를 바라볼 때 '어라, 이런 형태였나' 하고 느낄 때가 있던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이른바 게슈탈트 붕괴라는 녀석입니다). 이를 테면 '털'이란 글자를 가만 히 들여다 봅시다.

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털

 어째선지 이상한 형태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지 않나요?
 어째서 이런 경험이 생기는 걸까요. 이와우치 씨에 의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들은 일정한 관심 아래에서 세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글자를 읽는 경우에, 우리들의 관심은 글자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평소의관심에서 떨어져, 어째서인지 글자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상한 형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건, 이와우치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털의 "'의미'가 박탈당해", "(사물로서의)" "'존재'가 드러나는 경험"입니다(『철학입문』, p.95).

 이것은 문자뿐만이 아니라, 사물이 나타나는 방식에도 넓게 적용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주:게슈탈트 붕괴의 너머에는, 일상적인 사물의 이상한 모습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이상한 모이 진짜 모습 물자체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경험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사물의 방식이 항상 특정한 관심에 의한 것이며 사물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우리들이 평소 보고 있는 세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예감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복습해봅시다.

  • "타자" = 내면에 닿을 수 없는, 포착할 수 없는 먼 존재.

  • 세계는 일정한 관심에 의해 나타나지만, 특정한 문맥에서 벗어나면 이상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걸로 '털복숭이 묘사'를 설명하는 무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눈치가 좋은 분은 이미 알아채셨겠습니다만, "털복숭이 묘사"는, 일상적인 의미가 박탈된 '존재'가 나타난 게슈탈트 붕괴와 같은 류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입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어, '털복숭이 묘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큰 힌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우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사물이 나에게 무관심한 듯한 체험도 하게 된다.

『철학입문』—— p.95

 위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털복숭이 묘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털복숭이 묘사'는 "시마무라에게 나타나는 아다치"와, "아다치 그 자체"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암시하는 경험을 묘사한 것이며, 시마무라가 무한히 끝도 없을 '타자'에 접하는 것을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평소에 접하는 '타자'란 것은, 우리들이 특정한 관심 아래에서 이른바 '만들어낸' 이미지이며, 그것은 그 사람 본래의 모습(혹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그 자신의 이미지, 혹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그 사람의 존재방식)으로부터 떨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털복숭이 묘사'는, '타자'에 관해 그러한 예감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해에 도움이 되셨는지요. 실은 이 '포착할 수 없는 "타자"를 접한다'는 테마는,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있어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 보류해두었습니다만, 여기서 '타자' 개념이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있는 중심적 테마 중 하나라는 것을 실제로 작품을 인용하면서 확인해보겠습니다.


 먼저 1권 105쪽, 『아다치 퀘스쳔』에서

시마무라는, 시마무라였다. 아마도 쭉, 내 안에서는 시마무라이다.

이루마 히토마,『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105頁

라는 1절입니다.

 "내 안에서는 시마무라이다"라는 묘한 말투입니다만, 요약하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시마무라 호게츠란 인물은, 시마무라 호게츠 자신에게는 '나(わたし)'로ㅓ서 (시마무라의 관심 아래) 나타나고, 시마무라(여동생)에게는 '언니(ねーちゃん)'로서 (역시 여동생의 관심 아래) 나타나며, 할머니에게는 '호게츠'로, 그리고 아다치 사쿠라에게는 '시마무라'로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에 대해 (그 관심 아래에서) 나타난다'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표상'이라고 합니다. 즉, '시마무라'라는 것은 아다치 사쿠라가 갖는 시마무라 호게츠의 '표상'이다, 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표상을 매개로 하는 것 외의 방법으로는 타자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했던 것처럼, 표상은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주관적/상대적 존재입니다. 이것은 외롭게 들리기도 합니다만, 아다치는 진취적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시마무라는, 시마무라였다. 아마도 쭉, 내 안에서는 시마무라이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거기엔 안심감이 든다. 쭉 하고 긴장이 빠지는 울림이 있다. 좋은 일이다.

入間人間『安達としまむら』——1巻, 105頁(번역 필자)

 표상을 매개로 하는 것 외에는 닿을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실은 여기에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힌트가 있습니다만 이는 note의 후반부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끝도 없이 먼(=표상을 매개로 하는 것 외에는 닿을 수 없는)'타자'와 접촉한다는 '털복숭이 묘사'와 공통하는 테마가 위에 제시한 아다치의 독백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인용은, 1권『미래 피싱』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입니다(대사 이외의 부분은 생략함).

"뭔가 걸려들지 않으려나?"
"일단은 잡히길 바라는 그 생각이 중요해요."
"뭐?"
"좀처럼 잘 잡히지 않는다, 뭔가 잘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p.79

 위의 대화에서 낚시를 하는 행위는 분명 무언가의 은유, 메타포입니다.

 굴곡 없이 생각한다면 『미래 피싱』이란 타이틀과 같이, "낚시를 하는 행위"는 "미래를 향해서 행동을 일으키는 일"의 메타포다, 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해석은 미래 피싱의 후반부분(시마무라가 아다치를 수업에 초대한다)을 생각하면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저는 "낚시를 한다"가 "도달할 수 없는 '타자'와 교섭하려는 것'의 메타포라는 해석도 동시에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애니메이션 판의 제 1화 인트로(즉, 제일 첫 장면) 컷에 보이는 것은 두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2화, 4화, 5화, 7화, 8화, 12화에 시마무라와 여동생이 기르는 것으로 보이는 금붕어 두 마리(그것도 한 마리는 파란색! 아다치를 연상시키는!) 만을 비치는 컷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더해서 '연못'에 대해서, 소설판에서는 아다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시마무라 본인보다 더 시마무라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건 시마무라를 많이 이해하고 있는가, 와는 다른 문제다. 아무리 연못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도, 연못이 얼마나 차가운지 무엇이 안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다치와 시마무라』——2권, p.61

 또한, 『미래 피싱』에 대해서도, 시마무라에 의해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탁한 연못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히노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꿰뚫어 봤다는 말이니까.

『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p.78

 위의 인용으로부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있어서, 물고기는 사람의 은유입니다. 그러한 「물고기=인간」은,  (탁한) 연못 너머에 있는 '아무래도 낚이지 않는' 존재, 즉 '타자'로서 그려집니다.

 이것들로부터, 포착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는 작품『아다치와 시마무라』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테마이다고 결론 지을 수 있겠지요.

 가설 ①의 검증은 여기까지로 하고, 가설 ②의 설명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멜랑콜리」란 무엇인가?

 가설②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설②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두 사람의 '멜랑콜리스트'가 그러한 '타자'와 만나서, '멜랑콜리'를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타자'라는 단어를 쓸 때 제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지금까지 간단히 설명해보았습니다.

 이 절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은, '멜랑콜리스트' 혹은 '멜랑콜리'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멜랑콜리스트'란, '멜랑콜리'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멜랑콜리'란 어떠한 상태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철학입문』을 참조해봅시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제가 이 note 를 쓰려고 한 계기가 된 것이 이 책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이제부터 서술한 '멜랑콜리'라는 개념이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세계관, 특히 시마무라 호즈키의 존재방식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와우치 씨는 「니힐리즘」과 구별하기 위해 「멜랑콜리」라는 개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보겠습니다만, 흥미가 있는 분은『철학입문』을 입수할 것을 다시 한 번 추천드립니다.

 그에 따르면, 리오타르(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1924-1998)를 인용하면서 이와 같이 니힐리즘을 설명합니다.

 근대(모던)이란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커다란 이야기Grand Narrative'를 믿어왔지만, 근대이후(이른바 포스트 모던) 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커다란 이야기'는 상실되었습니다.(『철학입문』, p.20)

 이것이 리오타르의 주장입니다.
 '커다란 이야기'란, 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일컫습니다.

 모든 나라는, 자본주의를 넘어서 공산주의에 도달한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는 해방된다.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은 '커다란 이야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지만, 아래의 내용도 넓은 의미에서 '커다란 이야기'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덕망 높은 삶을 살면, 하느님이 구원해주시고 천국에 갈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안정되고 행복한 인생이 약속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믿는 것으로 우리들은 일상적인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지만, 포스트 모던에 있어 '커다란 이야기'는 상실되었습니다. '커다란 이야기'가 상실된 결과, 사람들은 '모든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며 고뇌하게 됩니다. 이것이 니힐리즘입니다.

 '커다란 이야기'의 상실이 니힐리즘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이와우치 씨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저의 이해가 정확하다면… 말이지만요).

 맑시즘의 실패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만, '커다란 이야기'의 상실이란 목표나 신앙이 이뤄지지 않고 '좌절'된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가치관이나 그것을 향해 달려가던 운동이, 실패함으로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성에는 특정한 이벤트를 일반화 혹으 전체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것이 칸트에 의한 통찰입니다). 이에 의해, 특정한 의미가 상실되는 일은, 세계 전체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까지 격상됩니다. 즉, "○○(이를 테면 노동운동)은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일반화 전체화를 향한 이성의 움직임을 받아서 '모든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감각까지 확대한다는 것입니다(『철학입문』, p.24).

 니힐리즘은 이런 식으로 생겨납니다. 이와우치 씨는, 니힐리즘을 '의미 상실의 경험', '욕망의 좌절'이라고 형용하고 있습니다(상동, p.24).


 유의할 점은, 니힐리즘은 처음부터 느끼고 있던 거대한 가치가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아다치나 시마무라는 니힐리스트가 아닙니다. 그녀들은, 거대한 이야기의 상실(맑시즘의 좌절)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이것을 적고 있는 저 자신도) 그러한 의미가 상실된 뒤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세대는 무언가 커다란 좌절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강한 의미 그 자체를 찾아내기 어려운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철학입문』, p.24). 이것이 이와무치 씨에 의한 '멜랑콜리'의 정의입니다. 그는 멜랑콜리를 '욕망의 비활성'이라 형용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명철하고 적확한 표현이며 바꿔 말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그대로 직접 인용합니다.

니힐리스트는 전통적 권이에 대해 '공격성'을 갖고, 모든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허무감'에 시달리지만, 멜랑콜리스트의 문제란 욕망의 불만이 쌓이고 쌓여 생긴 '권태'나 '피로' 그리고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의미도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디스일루젼(환멸)의 예감'이다. 요약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기묘한 욕망을 멜랑콜리스트는 살아간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니힐리즘은 절망의 한 형태이지만, 멜랑콜리에는 희망도 없으며 절망마저도 없다고.

『철학입문』——p.25

 시마무라가 자아내는 '나른함'과 같이 것이 훌륭히 언어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세계관에는 치카마 야시로(자칭 670세의 외계인이자 미래인!!)이 등장하는 등 비현실적인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현실적이고 리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초기의 아다치 그리고 시마무라가 멜랑콜리스트로서 그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마무라가 멜랑콜리스트적인 부분을 시사하는 묘사에는 끝이 없습니다.

 나는 혼자서는 전혀 게임을 하지 않는다. 책도 안 읽고, 영화도 안 본다. 쇼핑도 계절이 바뀔 때에 맞춰 옷을 사러 가는 정도다. 휴일엔 뭐 하고 지내? 아다치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대답할 말이 없어서 조금 난처했다. 휴일이면 항상 멍~하니 지내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p.158

 틈만 있으면 무언가를 팔려고 하는 왕성한 상인 정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는 이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본 적이 없다.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다치와 시마무라』——2권, pp.16~17

 졸업 문집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마디씩 코멘트를 달아 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럴 때 무슨 말을 써 주면 좋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어린이였다. 결국 무슨 말을 적어 주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다치와 시마무라』——2권, p.18

"시마무라는 뭘 좋아하는지 알아?"
"그 녀석이 좋아하는 것…이라니 그런 게 있어?"

『아다치와 시마무라』——2권, p.137

 시마무라는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반복해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초기의 아다치에게도 같은 경향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작품 초기 즉 시마무라 라는 아다치에게 있어서 거대한 가치를 만나기 전 혹은 만난 직후로 한정되어있습니다. 특히 그 경향이 현저한 것은 4권 인트로 중학교 시절의 아다치가 그려진 『벚꽃과 봄과』에서입니다. 어느 대학의 입시 시험에도 출제되어 화제가 된 부분이군요.

 이 장에서 반복되는 것은 아다치가 주위 세계를 향해 봉리는 '흥미 없음' 입니다. 중학교 시대의 아다치는, 학교생활에도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화자에게도, 그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흥미 없음'은 아주 멜랑콜리스트 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힐리스트라면 학교생활이나 타자의 의미를, 적극적 혹은 공격적으로 무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의 아다치는 멜랑콜리스트이지 니힐리스트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다음의 묘사입니다(대화 사이의 지문은 생략).

"책, 안 읽어?"
"좋아하는 책은 읽어."
"내가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소개해 줄까?"
"응? 아니, 별로 필요 없는데."

入間人間『安達としまむら』——4巻, 17頁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기껏 생각해 줬는데 친근한 표정 하나 짓지 않다니. 그렇다고 귀찮은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사쿠라는 그냥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관했다.
정말로 흥미가 없는 거구나.
그 덕분에 이쪽은 더욱 사쿠라에 대한 흥미가 샘솟았다.

入間人間『安達としまむら』——4巻, 17頁

 일반적으로 믿어온 가치를 성가시다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무화하는 것이 니힐리스트입니다. 그러나 아다치는 그저 무관심할 뿐입니다. き아주 멜랑콜리스트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 말해도 좋겠지요.

 이상을 통해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멜랑콜리스트'이다, 라는 저의 주장에 설득력을 느끼셨는지요.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어떻게 '멜라콜리'에서 탈출했는가?


 가설②에 관해,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 멜랑콜리는, 어떠한 욕망도 샘솟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그러한 상황에 빠져있는 멜랑콜리스트들이다.

 아래에서 검토할 것은, 두 사람이 어떻게 멜랑콜리에서 탈출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점점 멜랑콜리의 문학이 게슈탈트 붕괴해버릴 것 같습니다만, 조금만 더 견뎌주십시오.


 먼저, 아다치에 대해서. 

 위에서 본 것처럼, 중학생의 아다치는 멜랑코리스트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시마무라와 만남으로써 명백히 멜랑콜리스트로부터 탈출하였으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이 가장 강렬하게 묘사된 것이 모두들 좋아하는 『시마무라의 칼날』(5권) 파트이지 않을까요.

 먼저 인용한 것처럼, 멜랑콜리스트에게는 "희망도 그리고 절망조차도" 없습니다.(『철학입문』, p.25)

 『시마무라의 칼날』에서는 아다치가 갖는 절망과 같은 것이, 충격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 형용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둘째치고, 이 아다치의 거대한 감정은 시마무레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다치가 구체적으로 언제 멜랑콜리스트로부터 벗어났는가, 즉 언제 시마무레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가를 핀포인트로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마도 『미래 픽션』에서 시마무라의 손을 잡는 시점(1권, p.92)에서는 시마무라가 아다치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다치는 어떻게 멜랑킬로스트로부터 탈출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아다치에게 있어서, 시마무라와 만난 것이 멜랑콜리스트로부터 탈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다치는 비교적 빠른 단계에서 멜랑콜리스트로부터 벗어났습니다만, 시마무라의 멜랑콜리스트적인 태도는 꽤나 끈질깁니다. 이쪽도 『시마무라의 칼날』에서 현저하게 묘사됩니다.

 많은 아다시마 팬의 기억에 새겨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다치가 그 정도로 강렬한 방법으로 감정을 부딪힌 것에 대한 시마무라의 응답은 "성가시네" 였습니다(5권, p.124).

 이제 귀에 딱지가 앉으셨겠지만, 멜랑콜리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무기력함, 무관심함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마무라의 뿌리 깊은 멜랑콜리스트 성이 보입니다.

 아다치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시마무라가 언제 어떻게 탈 멜랑콜리를 성취했는지는 단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아래의 세 항목을 나는 자신과 근거를 갖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1. 시마무라가 탈 멜랑콜리를 성취함.

  2. 「타자」가 그 계기를 제공함.

  3. 「타자」를 계기로 하는 시마무라의 「탈 멜랑콜리」가 『아다치와 시마무라』 최대의 테마이다.

 먼저 첫 번째 항목에 대해.

 위에서, 시마무라에게는 강한 고집(=욕망)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실은 그렇게 단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서같은 부분이 있단 뜻입니다. 게다가 그건 아다치와 만난 꽤 초반 부분부터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체육관의 2층에 히노와 나가후지가 오는 것에 대해,

나도 근본적인 원인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히노와 나가후지가 이곳에 온 것은 뭔가 잘못됐다. 그런 강한 감정만은 아주 확실했다.

『아다치와 시마무라』——1권, p.57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멜랑콜리로부터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시마무라의 세계에는 무언가 의미가 싹트고 있다, 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시마무라가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한 것이 분명해진 것은 8권의 종반, 안개 속에서 아다치와 손을 잡는 장면이 아닐까요(대사의 사이사이 설명은 생략).

"시마무라가 없어지면, 이런 하루하루가 되겠구나… 하고."
"...................................."
"..….시마무라?"
"나도야"

『아다치와 시마무라』——8권, p.미상(전자책)

 이러한 신비적인 장면을 설명하는 것은 야만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시마무라가 없어진 매일이란 멜랑콜리(혹은 의미가 상실된 경험이기에 니힐리즘)의 나날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시마무라가 "나도 그래"라고 대답한 것을 생각하면, 시마무라도 이미 멜랑콜리를 탈출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번째 주장에 대해서입니다. 여기서는 슬슬 지금까지 논했던 '타자'와 '멜랑콜리'의 문제를 접속시키려고 합니다.

 『철학입문』에서 타자가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한 계기가 될 만한 부분이 아래와 같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직접 인용합니다.

(전략)타자는 <나>를 초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타자의 마음은 절대로 현전하지 않습니다 (중략) <나>와 타자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그 단절이 관계 불안의 근원이지만, 하지만 또 하나의 ——<나>의 관념으로는 절대로 무화할 수 없는——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얼마나 자신에 갇혀있으려고 해도, 얼마나 권태를 느낀다 하더라도, 타자는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온다.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호소해 온다. 즉, 타자는 멜랑콜리의 외부에 있다.

『철학입문』——p.273

 인용한  전반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검토해온 '타자
'의 개념입니다.
"타자는 멜랑콜리의 외부에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 기사의 전반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세계는 <나>의 관심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멜랑콜리스트적인 관심 아래에서 나타나는 세계의 표상은, 처음부터 부화된 몰의미/몰가치적인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타자'는 '털복숭이 묘사'가 시사하는 것처럼, 나의 관심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기에 "<나>의 관념(≒관심)으로는 절대로 무화될 수 없는""<나>를 초월한 존재"입니다.

 끈질기긴 하지만, 조금 더 간략히 말하면 이와 같습니다."애초에 세계에 의미나 가치따위 있을까?"라는 관념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이게 됩니다. 말하자면, 멜랑콜리스트의 감각은, 자기 주변의 세계 전체를 감염해버린다(=세계가 '무화'되버린다).

 그러나 "타자"는 <나>의 세계 반대편에 있다. '타자'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확실히 실재한다. 그렇기에 감염에서 벗어날 수 있다(='타자'는 무화되지 않는다).

 "타자"는, 그 내면에 액세스 불가능한 무한히 먼 존재이기에 <나>의 멜랑콜리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타자'와 '멜랑콜리'의 관계는, 『아다치와 시마무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반에서 인용한 이 부분입니다. 

시마무라는, 시마무라였다. 아마도 쭉, 내 안에서는 시마무라이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거기엔 안심감이 든다. 쭉 하고 긴장이 빠지는 울림이 있다. 좋은 일이다.

출처 상동

 '시마무라'란 아다치가 갖고 있는 시마무라 호우즈키의 표상이라 이미 지적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시마무라 호우즈키가 '타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에 대해 아다치가 안심감을 느끼는 것은, 아다치에게 있어 시마무라 호즈키가 "'나'의 관념으로서는 절대로 무화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시마짱의 담백한 옆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져. 그렇게 되면 패배. 아니, 승리라고 생각될 때가 있어…."

『아다치와 시마무라』——4권, p.80

 타루미의 이 말에는, '타자'와 멜랑콜리'의 관계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타자'는 시마무라가 탈 멜랑콜리를 성취할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주장입니다. '타자'가 탈 멜랑콜리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시마무라 자신도 직감하고 있습니다. 위의 위의 타루미의 대사 뒤에 시마무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조금 길지만, 아다시마에서 가장 중요한 독백이기에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나쁜 습관이라고 해야 할지, 아마 누구나 가지고 있을 감각…. 아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딱 그런 감각에 포함되는 건가.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이 모든 사람의 생각과 같다고 받아들일 때가 꽤 있는데, 그게 아마도 주변 사람에게 강한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가 아닐까 한다.
솔직히 자신과 닮은 상대를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지만 그건 대부분 착각으로, 이렇게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타루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이곳에 있다. 다른 사람은 나랑 다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상대와의 사이에 그려진 선을 의식했다.
신선한 감각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밖에 없다.
(중략)
단, 그 선을 넘어 상대의 맨얼굴을 엿볼 것인가 말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아다치와 시마무라』——4권, p.80~p.81

 시마무라의 버릇은, '타자'의 내면을 '나와 비슷한 거겠지'라고 잘라내 버리는 일이라고 본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더는 타자는 '타자'가 아니게 되어, 멜랑콜리로부터 대항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시마무라가 타자와의 "사이에 그려진 선을 의식했다"고 할 때, 즉, 타자가 자신과 다른 것이라고 인정할 때, 타자의 '타자'성의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인용에서, '타자'가 '관계불안의 원천'이리라는 이와우치 씨가 지적한 것처럼 타자가 '타자'인 것에 대해, 시마무라도 네거티브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인용한 독백의 문장은 그것을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마무라가 언제 어떻게 멜랑콜리 탈출을 감행했는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다치나 타루미가 시마무라에 대하여 그렇듯이, 시마무라가 타자를 '타자'라고 인정하고 거기에서 '관계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의미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멜랑콜리를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겠지요.

 '타자'의 내면에는 직접 닿을 수 없기에 우리들은 그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거기에 맞춰 행동하거나, 확실히 귀찮고 지치는 일입니다. 시마무라가 말하듯이, 그것은 스스로 '마모'되어가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1권).

 그러나 야시로의 어드바이스에도 있듯, '타자'를 '좀처럼 잘 잡히지 않는' 것으로 이정하고 '더 좋은 미래를 바라면서' 끈기있게 '낚시줄을 드리울' 때, '타자'는 <나>를 멜랑콜리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 않을까요.


 길었던 논의도 곧 끝납니다.

 처음의 주장, 즉 '타자'를 계기로 해 시마무라가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있어 최대 테마라는 것은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이야기를 간결하게 표현해주세요라고 질문한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저는 이와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주인공 시마무라가 아다치와 만남으로써, 의미가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는 것(=멜랑콜리부터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수히 있겠지요.


 나의 이러한 대답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합니다.

 먼저,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주인공은 아다치가 아니라 시마무라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란 무엇일까요?
 러시아의 문학연구가 유리 로트만(1922-1993)은 「어떤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자라고 설명합니다(『기호계 -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신화-이름-문화」, p.155)。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있어서 두 가지 영역이란, 멜랑콜리적인 세계와 비 멜랑콜리적인 세계이겠지요. 아다치, 그리고 시마무라는 처음에는 멜랑콜리적인 세계에 있습니다만, 아다치와 시마무라가 만남으로 즉 기승전결이라면 '기'의 부분에서 탈 멜랑콜리를 성취하고 있습니다.

 히노나 나가후지로부터는 처음부터 양기 넘치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비 멜랑콜리적인 세계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그래도, 멜랑콜리적 측면일 보이는 등 깊이가 있습니다만). 시마무라(여동생)이나 야시로는 멜랑콜리와 무연한 듯합니다.

 역시 주인공은 시마무라로 보는 게 적절하지 않겠는가요.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서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J. 힐리스 밀러(미국의 문학연구자, 1928-2021)는 이야기의 모두란 그 뒤의 이야기의 일부를 '선취적으로 혹은 제유적으로 제시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문학을 읽는 법文学の読み方』, p.33)。

 즉, 소설의 서두에는 그 뒤에 반복될 테마를 상징하는 것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다시마의 서두는 다음과 같습니다.

 같이 수업을 수업을 땡땡이 친 아다치가 "탁구 치자."라고 말을 꺼낸 것을 계기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탁구 붐이 일었다.

이루마 히토마『아다치와 시마무라』— 1권, 리디북스 전자책 미리보기 

 특필할만한 것은, 아다치란 '타자'가 원인이 되어 무언가 시마무라로부터 흥미의 대상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일 테지요.


 또 이렇게 생각하자면, 아다치가 자전거에 타고 있는 것 또한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다치라고 하면 자전거, 자전거라고 하면 아다치지요. 아다치의 자전거는 작중에서 몇번이고 등장하며, 애니메이션의 키 비주얼에도 아다치가 자전거 중앙에 그려져 잇습니다. 마주보듯이 시마무라가 동승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합니다.

 자전거란 멜랑콜리적 세계로부터 비 멜랑콜리적 세계에 이동하는 것을 상징하는 탈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마무라가 아다치의 자전거에 동승하는 듯한 구도는, 역시, '타자'를 계기로 탈멜랑콜리라는 테마를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상으로부터 '타자'를 계기로하는 시마무라의 '탈멜랑콜리'가 『아다치와 시마무라』최대의 테마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 번째 주장에 대한 설명은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점을 정리해봅시다.

  • 먼저, '털복숭이 묘사'는 일상적인 의미가 떨어져나간, 즉 내가 갖는 표상의 바깥 편에 있는 '타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예감하도록 만드는 묘사이며, 거기에는『아다치와 시마무라』에서 반복되는, 무한히 먼 '타자'라는 테마가 특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 '타자'는, 무한히 멀기 때문에 '멜랑콜리'에 의해 무화되지 않습니다.

  • 『아다치와 시마무라』는, 의미를 상실한 세계에 살아가는 두 사람이 그러한 '타자'와 만남으로써 멜랑콜리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이하, 후기입니다.
 이런 긴 기사를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아주 기쁜 일입니다. 감상, 반론 등이 닿을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썼습니다만, 이 note의 동기가 된 것은『새로운 철학의 교과서 新しい哲学の教科書 現代実在論入門』입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직감적으로 가설②가 떠올랐습니다.

 그 뒤, 아다시마를 다시 읽음으로써 가설①이 떠올랐습니다.
 두 가지 가설을 멍하니 머릿속에서 넣어두고 있다가는 잊어버릴 듯해서, 그것은 아쉽지 싶었기에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이번에느 두 가지 가설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언급했습니다만, 『아다치와 시마무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직 더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름에 대해서. 치카'마'(知我「麻」) 야시로의 말버릇은 '운명~'입니다만, '마(麻)'의 꽃말은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어째서 시마무라 호게츠란 문호가의 이름이 쓰였는가, 등등등… 주장이 정리되면, 그리고 기회를 만난다면 언젠가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여기까지 쓴 일은 저 자신의 아다시마 해석에 불과하며, 이 해석이 가장 우수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사의 중반에서 확인했듯이, 세계는 "나"의 관심에 근거하여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생각을 따르자면, 지금까지 옹호했던 나의 아다시마 상은, (「현대철학의 입문을 참조하면서 note를 쓰겠다!」란 관심 아래) 나에게 나타난 상대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다시마 표상은, 제한 없이 다른 모습으로도 있을 수 있겠죠.

 다만 상대적인 것만이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도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듭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나의 아다시마 표상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되도록 세심하게 글로 남길 참입니다.

 이를 읽은 타자(수년 후의 자신도, 이미 '타자'라 할 수 있겠죠)가, 지금의 아다시마 표상을 추체험(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이것을 쓴 목적은 충분히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문헌〉
岩内章太郎. (2019).『新しい哲学の教科書 現代実在論入門』 東京, 日本: 講談社.
유리 로트만, 『文学と文化記号論』(磯谷孝訳). 東京, 日本: 岩波書店.
본 번역본에서는 한국어역인 『기호계 -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김수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3.을 참고하였다.
J. ヒリス・ミラー. (2008).『文学の読み方』(馬塲弘利訳). 東京, 日本: 岩波書店.

 文: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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