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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で韓国史学の論文を読んでみる-10-

다만 현재로서는 후연이 「광개토왕릉비」 에서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ただし現在のところ後燕が「広開土王陵碑」で前面に登場していないというのが大半の意見(衆論)である。

설령 등장한다고 하더라도,395년의 패려 정벌이 사실은후연을 공격한 것이었는데,패려를 공격한 것으로 바뀌어 등장한다고 보거나,고구려가 획득한 만여 벌의 개갑을 제작할 역량을 지닌 국가는 당대에 후연뿐이었다는 분석 정도이다.
たとえ登場したとしても、395年の稗麗征伐は実際には後燕を攻撃したのであったが、稗麗を攻撃したことと改変したとして登場させてみたり、高句麗が獲得した万余の鎧甲を製作する能力を持つ国は、その時代には後燕だけだったという分析程度のものである。

이는 후연이 등장할 만한 곳이 407년 전투 외에는 없기 때문이며,또한 立碑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광개토왕릉비」 의剥落이 심해, 당시의 상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도 한 원인이다.
これは後燕が登場するのに適する所が407年の戦いのほかにないからであり、また、立碑から長い時間が経って「広開土王陵碑」の剥落がひどく、当時の詳細な状況を把握するのは難しいことも一因である。

다만 백제가 개갑 만여 벌을 제작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407년 교전의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ただし百済が鎧甲万余を製作する能力がなかったので407年の交戦の対象とされていないと見るのは難しい。

5세기 이후 삼국의 전쟁은 점차 지속적인 장기전 양상을 보였다.
5世紀以降三国の戦争は次第に持続的な長期戦の様相を見せた。

고대의 전쟁은 특권적 戰士層만이 수행하는 것이었지만,점차 백성도 전쟁의 비용을 부담하고 병사로도 참가하면서,각국의경제력 역시 전쟁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古代の戦争は特権的戰士層だけが実行することがあったが、次第に民も戦争の費用を負担して兵士として参加するようになり、各国の経済力も戦争の重要な要素となった。

앞서 보았듯 백제는 상실한 땅을 수복하기 위해 계속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先に見たように、百済は喪失した土地を回復するために継続して高句麗を攻撃した。

이는 장기전을 뒷받침할 인적 •경제적 기반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これは長期戦を裏付ける人的•経済的基盤がない場合は不可能なことであった。

따라서 407년 고구려군의 전투대상은 백제가 주도한 백제와 왜 풍의 연합군이라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합리적일 것이다.
したがって407年の高句麗軍の戦闘対象は百済が主導した百済と倭系の連合軍と見ることが現時点で合理的である。

2. 후연 공격과 요동 진출
2. 後燕の攻撃と遼東進出

고구려와 후연은 전연이 었던 3세기부터 오랜 기간 요동의 패권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高句麗は後燕が前燕だった3世紀から長い間、遼東の覇権を得る角逐を繰り広げた。

八王의 亂(291-306)과 永嘉의 亂(307-312)을 겪은 西晋 왕조는강남으로 몽진하여, 東폴올 세웠다.
八王の乱(291-306)と永嘉の乱(307-312)を経験した西晋王朝は乱を避けて江南に移動し、東晋を立てた。

이때 미천왕은 西安平을 점령하는 등60)요동 진출을 꾀했으나,前燕의 성장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この時、美川王は西安平を占領するなど遼東進出を図ったが、前燕の成長のために失敗した。

고구려는 전연과요동을 놓고 각축을 벌였지만,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불타고 지배층다수가 끌려가는 큰 피해를 입었다.
高句麗は前燕と遼東をめぐって角逐を繰り広げたが、342年前燕の侵攻によって首都が燃やされ支配層の多数が引かれて行く大きな被害を被った。

이에 고구려는 전연에 稱臣하고 책봉을받았다. 370년 前奏이 전연을 멸망시켰으나,383년 동진 원정을 계획하였다가肥水에서 크게 패하였다.
これによって高句麗は前燕の臣下となり冊封を受けた。370年前奏は前燕を滅亡し、383年東進遠征を計画したが肥水で大敗した。

이후 전진은 쇠퇴를 거듭하다 멸망했다.
以降、前奏は衰退を重ね、滅亡した。

요동이 무주공산이 되자 고구려는 385년 遼東郡과 玄菟郡을 점령했다. 그러나 후연의 慕容垂가 두 군현을 다시 수복하면서고구려 와 후연은 요동을두고 다시 경쟁하게 되었다.

遼東が無主空山(공산)になるとすぐに高句麗は385年遼東郡と玄菟郡を占領した。しかし、後燕の慕容垂が二郡県を再び失地回復していくと、高句麗と後燕は遼東をめぐって再度競争することになった。

연구자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한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한 견해는 다르지만,광개토왕 집권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하였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삼국사기』에주로 등장한다.
研究者によって高句麗が遼東を占有した時点がいつであるかについての見解は異なるが、広開土王執権期に高句麗が遼東を占有したということでは意見が一致している。高句麗の遼東進出は『三国史記』に主に登場する。

나-1. 9월 북으로 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노획했다.더불어 우리나라가빼앗긴 팩성 1만 명을 불러 위무하고 데리고 돌아왔다.
나-1. 9月に北で契丹を攻撃し男女500名を虜獲した。加えて、我が国が奪われた民1万名を導き威風堂々と連れて帰って来た。

나-2. 영락 5년 을미에 왕이 패려가 오랫동안 (우리) 사람에□□□하지않아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나-2.永楽5年乙未、王は稗麗が長い間(我々の)人々に□□□していない自ら兵士を率いて討伐した。

富山,負山을 지나 염수에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営을 격파하니(노획한)소,말,양의 무리가 셀 수 없이 많았다.
富山、負山を通って鹽水に至ってその3つの部落600〜700営を撃破して(捕獲した)牛、馬、羊の群れが数え切れないほど多かった。

이에 왕이 수레를 돌려 襄平道를 지나 동으로□성,力城,北豊,五備□로 오면서 국경을 두루 돌며 살피고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ゆえに王は車を用意し襄平道を通って東に□城、力城、北豊、五備□へ来て国境をあまねく周り調査し、狩りをし、戻ってきた。

위 기록은 고구려가 契丹을 공격한 사실을 전하는 기록이다.
上の記録は、高句麗が 契丹を攻撃した事実を伝える記録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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