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下 大資

中日新聞/東京新聞記者。縁のあった方との情報交換や記録のためにnoteをつくりました。…

木下 大資

中日新聞/東京新聞記者。縁のあった方との情報交換や記録のためにnoteをつくりました。紙面ではスペースの都合で書き切れなかった部分を補ったり、韓国語訳したりしたものを置いておきます。 주니치신문/도쿄신문 기자. 인연을 갖게된 분들과의 정보교환을 위해 꾸미고 있습니다.

最近の記事

韓国の謝罪文化を考える2

◆子孫による謝罪 軍事政権期の大統領だった故・全斗煥氏の孫、チョン・ウウォン氏(27)が1980年の光州事件(通称5・18)の墓地を訪れ、事件の遺族らに謝罪した。 韓国社会で「受け入れられる謝罪」とは、こういうものなのか…と印象に残る出来事だった。 世間の厳しい視線にさらされる独裁者の一族に生まれたウウォン氏は、苦しみの多い境遇だったのだろう。居住先の米国で一族の秘密資金などの暗部を暴露し、自身もYouTubeで麻薬使用を告白するといった行動は、屈折した人物像をうかがわ

    • 【한국어】上岩洞日本軍官舎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향하는 철도 경의선 수색역(서울시 마포구) 인근에 1930년대에 지어진 옛 일본군 관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기억을 전하는 건물로서 현재는 지역 어린이들의 역사교육에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반일교육이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일본인도 있을 것이다. 어떤 내용인지 관심을 가저서 취재했다. (키노시타 다이스케)  집합주택들이 즐비한 상암동월드컵단지 일각에 목조 단층인 관사가 한적하게 선다. 단지개발이

      • 甘浦余録

        慶尚北道慶州市の港町・甘浦(カンポ)を訪れた。かつて植民地時代に日本人が拠点を築いた移住漁村のひとつだ。慶州は韓国の古都として知られるが、一般的には海のイメージは薄い。慶州中心部から車で1時間以上かかる甘浦は、陸の孤島のような立地もあって開発から取り残され、結果的に植民地期の日本家屋が多く残っている。 甘浦は元々は目立った産業のない寒村だったが、朝鮮総督府が1920年に港湾の基盤整備を行い1925年に開港。2万人が居住する計画都市として整備された。豊富な水産資源に支えられ、

        • 【한국어】甘浦の沐浴湯カフェ

          한국 남동부에 위치하는 경주시의 어촌인 감포에서 약 100년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욕탕을 리모델링하여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 '1925 감포'가 인기다. 한국에서는 '아픈 역사의 유물'으로 인식될 경우가 많은 일제강점기의 건물도, 동네 주민들에게는 오랫동안 이용해 온 애착이 있는 존재이기도 한다. 지역의 기억으로 보존하여 활성화 하려는 발상이 생겨나고 있다. (감포에서, 키노시타 다이스케) 온천 마크가 새겨진 번대(番台)가

        韓国の謝罪文化を考える2

          水崎林太郎追慕祭(2022年4月2日)

          岐阜市に勤務していた2017年に縁があって訪れたことがある大邱(テグ)の「水崎林太郎追慕祭」に5年ぶりに足を運んだ。 水崎林太郎(1868~1939)は岐阜県加納町(現岐阜市)の町長を務めた後、植民地期の朝鮮に開拓農民として渡り、「寿城池(수성못、スソンモ)」という溜め池を造った。干魃に苦しんでいた地元の朝鮮人からも感謝されたとされ、毎年この時期に追慕祭が営まれている。 水崎氏は生前「池のほとりに朝鮮式で埋葬してほしい」と遺言し、その墓が今も残る。寿城池そのものは大邱市民

          水崎林太郎追慕祭(2022年4月2日)

          【한국어】歴史に向き合う観光

           포항시 구룡포 앞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 했다고 한다. 구룡포에는 일제강점기에 풍부한 생선을 잡으려고 일본 가가와 현 등에서 이주한 일본인들이 만든 거리가 남아있다.  마을은 어업으로 번창했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은 따로 살았고, 학교도 따로 다녀서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았기 때문에 싸울 일도 없었다고 한다. 문화관광해설사 윤영숙씨(63)가 돌아가신 동네 어르신한테 들었던 에피소드들은 한일간의 근대사를 생각하는데 많

          【한국어】歴史に向き合う観光

          【한국어】あの人に迫る・藤本巧さん(2021年1月30日掲載)

           반세기를 걸쳐 한국에 자주 다니면서 농・어촌을 찰영해온 사진가 藤本巧(후지모토 타쿠미)씨(71). 최근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일식주택을 테마로 취재에 임해, 2001년에 출판한 사진집 “과묵한 공간~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어민과 하나이젠키치 원장”은 土門拳賞(도몬켄상)을 수상했다. 과거를 둘러싸고 일본과 많은 갈등을 겪는 이웃나라에 카메라를 돌려 온 그의 마음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키노시타 다이스케) ー한

          【한국어】あの人に迫る・藤本巧さん(2021年1月30日掲載)

          韓国の「謝罪文化」を考える【補筆あり】

           韓国大統領選の主要候補たちはよく謝る。特に与党「共に民主党」の李在明(イジェミョン)前京畿道知事は、党の失政をわびるとして国民に土下座してみせる場面もあり、日本人の感覚ではやや奇異な印象を受ける。過ちを認めて誠意を示す姿を重視する、韓国の謝罪文化について考えた。  「今までとは違う新しい民主党に生まれ変わろうという意味で、国民に謝罪のお辞儀をしよう」  2021年11月下旬、ソウルの党本部であった懇談会で李氏はこう述べ、報道陣のカメラに向かって土下座。5秒ほど床に頭を付け

          韓国の「謝罪文化」を考える【補筆あり】

          「追跡! 海と魚のまち」制作記

          2021年2月に愛知県蒲郡市の鈴木新聞舗が発行した「追跡! 海と魚のまち〜蒲郡市の水産業の記録〜」は、中日新聞蒲郡通信局の記者である木下が執筆してきた水産に関する記事を、A4判40ページの冊子にまとめたもの。 https://www.chunichi.co.jp/article/210834 新聞の企画記事が書籍になる事例はたまにあるが、地方版の連載を新聞販売店とコラボして冊子化する今回の試みは、社としてもあまり前例がなかった。自分にとって初めて新聞以外の媒体を作る経験だ

          「追跡! 海と魚のまち」制作記

          麗水余録

          2020年7月現在、コロナ禍で渡韓できない状況が続いている。 2020年4月に中日新聞に掲載された「ニュースを問う 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の連載が縁でつながった方々と情報を共有する意味も込めて、2019年8月に麗水(ヨス)を訪れた際の記録を残しておこうと思う。 私は2017年に愛知県蒲郡市に赴任してからしばらく経って「愛知村」のことを知った。これまでに勤務した名古屋、岐阜でも韓国との縁を感じるテーマに出会っており、ここでもぜひ深掘りしてみたかったが、手掛かりは少なかっ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4

          한국의 “아이치 촌”을 쫓아서(4) 한일관계를 푼다 동요 작사로 알려진 시인 노구치 우죠(野口雨情,1882~1945년)는 일본 여러 곳에서 그 지역의 풍경을 노래한 민요를 많이 남겼는데, 당시 “외지(外地)”였던 한반도에도 우죠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수로부터 귀환(帰還)한 사람들이 만든 책자에 우죠가 작사한 “여수 가요”라는 노래가 게재되고 있었다. (가사) 내지(内地) 조선 연락선이 출입해 활기찬 여수 항구 해로2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4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3

          한국의 “아이치 촌”을 쫓아서(3) 식민지의 실상 한반도가 해방되기 전에,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한 어촌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귀환자(帰還者)들이 작성한 명부를 더듬어, 한국 여수에 있던 “아이치촌”을 생략 아는 사람을 만났다. 여수 태생이고 지금은 아이치현 가마고리시(愛知県蒲郡市) 거주 고바야시 시게에 할머니(93)는, 18살 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살았던 여수의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놀라울 정도로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3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2

          한국의 “아이치 촌”을 쫓아서(2) 귀환자(帰還者)의 재방문 “동네 모두가 환영해 주었어. 반일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1970~80년대에 세 번, 한국의 남부 여수를 방문한 아이치현 가마고리시(愛知県蒲郡市)의 혼다 쯔네오 씨(71)의 기억이다. 여수로부터 귀환한 사람과 그 가족으로 구성된 레이스이회(麗水会, 여수회)가 1976년에 전후(戦後) 처음으로 여수를 방문했을 때. 여수에서 태어난 부친 故토시오 씨가 약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2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1

          한국의 “아이치 촌”을 쫓아서(1)바다를 건넌 어민 “저의 어머니의 아버지는 본인의 어선으로 조선에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수에 계셨다” 아이치현 가마고리시(愛知県蒲郡市)의 어업을 취재 했을때, 미야(三谷) 어업조합의 고바야시 토시오 조합장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한 시기에 아이치현 미카와(三河) 지방을 중심으로 어업자들이 여수로 이주해 “아이치촌”을 형성시켰다고 한다. 학생시절 한국에 유학

          【한국어】韓国の「愛知村」を追って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