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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MATA

  • 원작에 없는 인물/설정/전개는 모두 가공입니다

  • 고증무시, 뇌피셜그뭔십 주의

Fermata/늘임표
- 음표 위 : 악곡의 감정을 생각하여 음의 길이를 원래 박자보다 2~3배 늘여 연주.
- 겹세로줄 위 : D.C.(다 카포), D.S.(달 세뇨)따위와 같이 쓰여 곡을 마치라는 뜻.
Coda/코다
코다는 이탈리아어의 ‘꼬리’에서 유래되어, 특별히 추가된 종결부를 뜻한다. 모든 반복 기호에 의한 반복 연주시, 코다와 코다 사이의 마디는 생략하고 연주.
Da Capo(처음으로 되돌아감), Dal Segno(세뇨𝄋 위치까지 돌아감) 등과 병용.




𝐷𝑎 𝐶𝑎𝑝𝑜 𝑎𝑙 𝑐𝑜𝑑𝑎

1

나는 달리고 있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익숙한 교정, 얕은 모래가 깔린 운동장.
트랙을 돌듯 반시계 방향을 따라서 지면을 밟는 감촉이 생생했다.
아마도 코트 다음으로 발에 익은 감각일 것이었다.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다는 느낌. 박차고 달려나가는 순간 안면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 현실감이라기보다 생활감이라고 불러야 적절할 만큼 생생한 일상. 다만 가운데를 설렁설렁 달리고 있는 것은 바깥으로 뛰어야 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멀었으니까, 여유롭게.

잠시 한눈을 판 탓일까,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등을 밀치는 손이 뻗쳐왔다. 아직 내 차례가 아닌데, 그 손에는 바톤이 들려 있었다. 어리둥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고 이내 바깥 트랙을 향해 뜀박질을 옮겼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세는 것을 잊었을 즈음, 왜 다음 주자가 앞에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그제서야 들었다. 그때서야 지쳤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는 사라져 있었다. 체육관도 물론 보이지 않았다. 위화감에 발밑을 내려다보니 운동장도 사라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느새 상하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숨막히리만치 흰 벽지와도 같은 공간에서 여전히 나는 달려나가고만 있다. 방향도 기약도 모른 채, 그저 바톤이 쥐어졌으니 뛰고 있을 뿐이었다. 땅을 밟고 있기는 한 것인지, 뛰면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는 것인지, 애초에 앞은 어디며 나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인가. 막막함에 숨이 차오르자, 머릿속마저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많은 생각의 진행에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혹은 아주 짧은 찰나가 지났을 뿐이었는지 가늠할 길도 없었다. 지금이 나 또한 사라지는 순간이라면, 바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까지 마음의 소리를 되뇌었을 때, 눈을 떴다.
눈앞은 여전히 백색으로 채워져 있었으되 이번에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천장 마감재 특유의 구멍난 패턴이 하나의 표지처럼 작동했다.


2

“…ㄹ려?”
“후지마, 정신 들어? 나 보여?”
“야야, 가만있어봐. 후지마 눈 떴다.”
“하세가와 어디 갔어. 아직이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희미하게 맴도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점점 더 커지고 분명해졌다. 뭐야, 나 왜 누워있지? 습관처럼 홱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하나가타가 화들짝 놀라며 저지했다.

“그렇게 막 움직이면 안 돼. …하세가와가 집에 연락해서 어머님 오시고 계셔.”

살면서 이토록 무겁고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 그러니까”

간신히 울음을 그친 유즈키가 바싹 마른 입을 겨우 열었다.

“…여기 왜 있는지 알겠어?”

의사가 지남력을 확인하기도 전이건만, 마음은 왜 급한지.

“으음… 경기, 있었죠?”

깨어난 후지마는 뭐가 뭔지 싶으면서도 빠르게 주위를 훑으며 드문드문 말을 이었다. 다행히 본인이 누구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는 있는 듯하니 최악은 면한 것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닌데 사물이 약간 흐린데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선배들과 다른 농구부원들의 분위기가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후지마. 넌… 그리고 우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유즈키가 고개를 숙인 병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수액의 흐름조차도 멈출 만큼 숨이 막히고 목이 메어온다. 이 모든 것을 어디서부터… 병실의 수많은 학생들을 구원한 것은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였다. 유니폼도 미처 갈아입지 못한 하세가와가 대충 저지를 걸친 채, 간발의 차이로 의사와 간호사보다 먼저 문턱을 밟았다.

하세가와의 유니폼이 시야에 들어오자, 후지마는 홀린 듯 눈이 커지며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무심결에 침대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카즈시, 우리 시합은”
“다른 사람들은 이제 요코하마로 돌아갈 거야.”
“뭐…?”
“이겼어도 다음 시합에 네가 나가는 건 무리잖아.”
“…감독님은 학교랑 계속 통화중이시고……미안, 후지마.”
“유즈키 선배까지 왜 그래요.”

“경기 중에 이마가 찢어져서 의식을 잃었어. 의사 말로는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대.”

하나가타가 전달하는 설명을 들으며 그나마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미지들은 하세가와의 유니폼 덕분이었다.

“출혈 때문에 바로 실려왔고 머리 쪽이라서 좀 두고봐야 된다더라. 그래서 어머니 오시는 중이고, 웬만하면 움직이지 마. 절대 안정 취하랬어.”

하세가와는 그제서야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소매로 연신 훔쳤다. 의료진은 바이탈을 체크하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준 뒤 나가면서 보호자 인적사항 관련 서류를 건넸다.

3

요코하마로의 전원과 퇴원을 마치자, 후지마는 체육관 대신 하세가와의 집에서 강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좀이 쑤실 즈음 몰래 가벼운 산책을 하러 가면, 비어버린 인터하이와 비어버린 코트가 다시금 안면을 가격하는 착각이 들었다. 인사도 없이 사라진 감독과 함께 불길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여름방학 동안은 다들 애써 모른 척하며, 개학한 뒤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은퇴’를 마무리짓지 못한 3학년들까지 애매한 쓴웃음을 삼키며 소일했다.

한가하게 개학을 기다리는 교정에서는 3학년 주전 멤버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부실에 모이는 일이 잦아졌다.

무라야마는 개학 직전이 되어서야 후지마를 조용히 불러 독대했다. 올 것이 왔다는 주장 선배의 비장한 표정이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라야마조차도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입이 무거워졌을 따름이다.


두 사람이 기밀을 엄수한 것과 상관없이 개학과 동시에 퇴부 행렬이 이어졌고, 어수선한 기류와 각종 뜬소문이 삽시간에 남은 사람들을 에워쌌다. 농구부는 여전히 수십 명의 부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단순 취미 이상으로 부활동을 이어왔던 학생들의 이탈 경향은 현저했다. 부활동 시간에 감독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터하이 패배로 쫓겨나듯 사퇴한 소식은 이제 만천하가 다 아는 공식이 되었고, 후지마가 다음 주장이라는 사실은 지나가는 개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혼자 동급생을 두고 은퇴를 앞둔 3학년 주전들에게 불려가 장시간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나오는 모습은 곧 일과로 자리잡았다.


4

차마 나몰라라 할 수 없었던 3학년들은 답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연일 ‘비상대책회의’ 비슷한 것을 열곤 했다. 무엇보다 불길한 것은, 감독을 경질해놓고도 다음 감독을 선임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임 감독은 비록 쇼요를 2인자에 머무르게 한 죄목이 있을지언정 농구부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루이틀 재직한 것도,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인터하이 도중에 탈락한 것을 계기로 한 마디 말도 없이 증발당해버린 기이한 사건은 누가 보아도 정황이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운동부로 이름이 좀 있다는 학교들은 설령 감독을 교체하더라도 상식적인 절차가 있고 가능하면 공백을 길게 두지 않는다. 학생들의 한정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후지마가 부상으로 빠진 경기를 제대로 매조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3학년 주장 무라야마는 틈틈이 졸업생들을 수소문해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모은 정보로 앞으로의 방향을 대강 정리해 후지마와 상의하면서, 하세가와까지는 일부를 공유해도 괜찮지만 그 외에는 당분간 철저히 함구할 것을 당부했다. 출전정지를 감수하고 당장 전학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얼기설기 흉내를 낸 로드맵은 다음과 같았다.

  • 농구부 출신 졸업생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수뇌부의 횡령, 배임, 연루된 파벌 싸움 등을 의심하고 있음

  • 전적으로 미루어봐도 인터하이 성적이나 카이난과의 라이벌리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

  • 당장 빈 자리를 맡을 만한 인물은 찾기 어려우나, 윈터컵을 전후해 학교측과 담판을 짓고 감독을 선임해 내년을 대비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으고 의견을 전달할 것

  • 인터하이 후 2학년을 중심으로 경험을 쌓고 후년에 대비하는 프로세스에 비추어, 전임 감독이 염두에 둔 차기 주전 멤버는 후지마, 하세가와, 타카노, 이케우치, 나가노, 히라누마, 하나가타 등

  • 윈터컵 전까지는 기존 3학년과 후지마를 중심으로 연습 및 지도

  • 향후의 문제와 방향은 감독 선임을 전제로 12월경 다시 논의


“그… 후지마. 미안, 경황이 없어서 말하는 걸 잊었는데”
“…?”
“…네 의견을 가장 먼저 물었어야 했어. 그렇지? 여기까지 말해놓고 나도 염치가 없지만, 강요하지는 않을게.
음…이 모든 걸 몰랐다고 한번 생각해봐. 전혀 못 들은 셈 치고, 인터하이 출전도 안 했다면 네가 어떻게 했을지.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너한테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어. 농구에 초점을 뒀을 때, 출전 정지를 감수하고 떠날 것인지 아니면 겨울에 새 감독님이 오실 거라 기대하고 남을 것인지 말이야.”
“……그런,”
“이미 감독님이 부재한 이상, 누구도 퇴부하는 사람의 결정을 막을 수도 책임질 수도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야.”
“무라야마 선배…”
“고의는 아니었어, 진심으로. 물론 네가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는 빼고 생각해야 돼.”
“……”
“그 경기도, 뒤에 일어난 일들도,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생각보다 널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봐, 후지마. 그러니까 그 다음까지 짊어질 생각은 마라.”

‘감독님이 언급한 멤버 중에 백업 포인트가드를 맡을 만한 사람이 안 보인다’, ‘그 중에 과연 몇이나 남을까’ 같은 말들을 무라야마는 눈물로 간신히 억눌렀다.

‘네가 빠졌다고 해도…우리가 그 때 조금만 더 제대로 했더라면—’

바로 그 때 평소와 같이 귀가하려던 하세가와도, 땅바닥에 홀로 엎질러진 후지마의 더플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유라는 단어는 왠지 거추장스럽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오늘 하루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굳이 이유씩이나 필요한가? 갑작스런 질문을 맞딱뜨린 미성년자들이 당혹스러울 것은, 처음부터 노정된 일이었다. 하나가타 토오루도 그랬다.

가뜩이나 과묵한 하세가와를 상대로, 후지마가 없는 공간에서 말을 섞기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하세가와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후지마의 빈 자리와 비어가는 라커룸은 모두에게 신산한 질문을 던져놓고, 각자의 해답을 요구했다. 떠넘겨진 것들은 버거웠다. 보통이라면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이 심해를 휘저었다. 이곳에 왜 있는지, 농구를 왜 하는지, 농구란 각자에게 무엇인지.

하나가타 토오루에게는 다소 유치한 화제였다. 또래보다 비상한 두뇌 덕분인지, 그는 험난한 세상물정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얼마쯤 냉소할 수 있게 되었다. 애늙은이 흉내와도 같다는 것을 알지만, 그토록 얼굴 반반하신 어른들의 얕은 수와 추잡한 속셈이 빤히 보이고 마는 것을 어쩌겠는가. 약간의 비웃음을 머금고서 한 발짝 떨어져 어리석은 인간들의 군상극을 내려다보는 익숙한 기분. 잊을 만하면 다른 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반복해서 상연되는 곳이 바로 세상이라는 무대였다. 무료 관람을 한다고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도 없었다. 방관이라는 객석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심심하기는 했지만, 그건 제4의 벽 안팎이 마찬가지여서 유용한 준거가 되지 못했다. 구차함 속으로 걸어들어갈 일은 그의 사전에 도저히 없고야 말 것이었다.

지나치리만큼 선명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하나가타의 시야에, 미지의 꼭두각시라고는 최근 몇 달 입을 꿰매고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지 않는 두 사람뿐이었다. 둘은 농구부에 들어올 때도 함께더니, 지금은 눈을 감은 채 심판을 기다리듯 제4의 벽 경계에 선 것이다.

하나가타 또한 그들 못지않게 농구를 좋아한다. 단지 농구에 매달릴 만큼 필사적이지 않을 뿐이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을 따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하면 진심이 아닌 가짜인 거라고, 누군가 규정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머저리들을 평소 경멸해왔던 하나가타였다. 그의 두뇌가 그렇듯, 또래보다 기량과 성실성이 뛰어난 두 사람은 비록 바보처럼 진지하기는 했으나 농구라는 것을 즐겁게 느끼도록 해주는 흥미로운 양념이요 자극제였다.

다만 하나가타의 렌즈 너머에 있는 모든 존재와 같이, 스스로가 무대 위의 꼭두각시인 줄 모르는 인형들은 조만간 눈앞에서 기꺼이 절벽으로 몸을 던지거나 다른 무대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무대와 현실의 경계선에 서 있는 감각이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와 유사할까? 구차한 세상으로 떨어져본 적 없는 천하의 하나가타도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줄이 끊어져도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이 있을까? 그들을 지켜보느라 무심결에 걸음을 옮긴 하나가타의 발자국 뒤로, 액자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있었다.

6

“만의 하나를 생각해서 후지마의 백업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2학년 중에는 찾기 힘들 것 같아. 이케우치도 지난 주에 퇴부 신청을 했고… 시기상조일 수도 있지만 1학년 중에 눈에 띄는 애 있을까?”
“신입생 중에는 이토가 들어오자마자 꽤 열심히 하는 모양이던데…”
“그래?”
“중학교 때 센터 말고는 다 해봤다는 것 같고… 포인트가드로 쓴다면 아주 작은 키는 아니니까 가능성 있지 않을까.”
“모리 감독님께 여쭤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되면 애초에 우리가 이러고 있겠냐?”

하세가와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모처럼 소위 ‘비상대책회의’에 2학년을 두 명이나 끌어들여놓고 3학년 주전들이 눈코 뜰 새 없는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2학년은 당연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너희 둘, 생각이 너무 많은 거 아냐?”
“……”
“그런 타입만 있으면 내년에 곤란한데…”

유즈키가 쓴웃음을 애써 밝게 포장하며 말을 걸어왔다.

“너희가 남는 걸 전제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안 나갈 것 같은 애를 골라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거야.”
“하지만 후지마의 백업이라고…”
“그건 후지마가 없어도 똑같으니까.”

맞는 말이다. 후지마가 없다면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할 주전급 포인트가드가 있어야 하는데, 동급생 중에는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1학년부터 주전을 꿰찰 정도의 실력자가 해마다 입학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후지마가 없어도’를 감히 상상할 용기를 지닌 사람이 이 가운데에는 없다는 게 핵심이었다. 입으로야 무엇인들 못 떠들겠는가마는, ‘후지마는 당연히 남는다’는 선택지에 모두를 가두었을 때 자명한 것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무라야마는 그 점이 숨막혀서 견딜 수 없었기에 짐짓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한 것이다.

후지마가 없어도 문제고 있어도 문제라는 말은, 곧 차기 주장 한 사람의 그릇을 아득히 상회하는 해일이 닥쳐온다는 것을 뜻했다. 무라야마와 유즈키뿐만 아니라 다른 3학년 부원들 또한, 진심으로 그 자리에 아무도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겨울에는 새 감독님이 오시지 않을까, 같은 책임지지 못할 말은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고―오히려 지극히 간절해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그러질 것만 같았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오늘의 고민들이 모두 괜한 걱정이었음을 웃으며 회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은, 자신들 중 누구의 잘못도 책임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총체적 무력감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력감도 아닌, 무력하다는 사실 그 자체. 급기야는 부인마저 하고싶은 것이었다.

“이토가 남는 게 확실해지면, 얘기해 볼게요.”
“……”
“이번 달 말까지는 기다려 볼까요? 다른 신입생들도 좀 살펴보고요. 제가 벤치에 있게 되면 주전으로 뛰어야 하잖아요. 하세가와나 다른 애들이랑 손발도 맞춰야 할 거고…”

누군가 알아서 독배를 가져가주길 바라고 그대로 둔 것이 아니었다. 3학년들은 목이 메어 할 말을 잃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울고 싶은 날이었다.



인터하이를 끝내고 은퇴하는 3학년들 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떠날 수 없게 되었다. 3학년을 보내고, 2학년을 올리고, 1학년 중 옥석을 가리면서 다가올 국체와 윈터컵, 그리고 내년 인터하이를 염두에 둔 프로세스가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만 했다. 정상적인 부활동의 정상적인 시즌이라면 으레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인터미들 등을 살펴 중학생 스카우트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2학년은 연습을 소화하고 경기를 뛰기만도 바쁘다. 아무리 생각해도 3학년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여 교통정리를 하고 살펴주지 않으면 무엇 하나 굴러가지를 않을 것만 같았다. 할 줄 알아서가 아니라, 3학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입시 준비 때문에 자칫 껄끄러워질 수 있는 분위기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나눠 십시일반으로 분담하자는 결론이 났다. 유즈키와 무라야마는 한때 새 주장을 뽑지 않고 한 학기를 버텨보자는 시나리오까지 거론하기도 했었다.

“당장 국체부터 2학년이 뛸 텐데, 주장은 있어야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니시지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후지마가 관둘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

요코하마의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3학년들이 선 코트의 온도는 아이스링크만큼이나 차가웠다.

“…그래. 우리 다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거지.”
“나가면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될 일이고. 아니면…”
“결국 후지마가 벤치에서 작전타임을 부르겠지.”
“우리가 할 일은 당연히, 전력으로 도와주는 거잖아. 하지만”
“……최악의 경우, 그 경기가 마지막이 된다는 거네. 후지마는”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뭐라도 하자는 얘기였는데…”
“역으로, 후지마를 어떻게든 뛰게 해서 이목을 끌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늦게라도 지도자가 올 가능성이…”
“그것도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잖아. 경험이든, 경기감각이든, 흐름을 읽는 눈이든 모든 면에서……게다가 아무나 앉힌다고 다 말을 듣겠어?”
“연습 때야 우리가 가서 돕는다고 해도, 실전에서 후지마가 벤치라면 연습 때도 벤치에 앉을 수밖에 없다고. 빌어먹을”

안타까운 것은 후지마야말로 이걸 모를 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최악인 점은 그걸 알면서도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 심지어 ‘공기’를 읽지 못할 리가 없다는 점까지. 후지마를 밀어넣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어쩌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의 자기방어에 불과했던가. 스스로 면벌부를 발급받기 위해서였건, 그렇지 않건 간에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였고, 역시나 미성년자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7

“이토를 다음 달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늦지 않아?”

하나가타의 조심스러운 참견에 타카노와 나가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하고는 상황이 다르잖아. 생각할 시간을 줘야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소대로 연습하면 애들도 각자 결정하고 움직이지 않을까.”
“그럴 듯하네.”
“일리는 있지만, 우리가 압박하는 뉘앙스를 주면 곤란해.”
“1학년 몇 명 돌아가면서 2학년 연습에 참여시키고 반응을 보면 감이 오려나?”
“그게 낫겠다. 돌아가면서 참여시키면 2학년한테 너무 자주 둘러싸이지 않아도 되니까.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후지마는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하세가와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감독이 사라진 후, 2학년은 이제 나갈 사람이 거의 다 나가고 차분히 정리되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하나가타는 이 상황이 조금 답답했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입에 올리지 않은 채, 부활동은 마치 원래 감독이 없었던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후지마를 중심으로 꾸려져 갔다.

한편 적당히 치고 빠지려던 하나가타는 완전히 잘못 걸려들어 그물에 잡힌 물고기 신세가 되었다. 원래도 준수한 백업 수준은 되었으나 주전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건만, 2학년이 이탈하는 상황 속에서 큰 키가 눈에 띄어 발목을 잡히고 만 것이다. 그 날로 무지막지한 맹연습의 굴레 속에 허우적거리느라 매일 죽을상을 하고 있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모아 죽도록 연습해도 앞일을 모르는데 1학년을 마냥 기다려준다고? 우선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지만, 러닝과 기술 연습으로 체력이 탈탈 털려 인내심이 고갈된 상태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치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내년에 후지마 백업으로 쓸만할 정도까지 만들려면, 누가 됐든 당장 오늘부터 밥먹는 시간 빼고 연습만 해도 모자란 거 아냐? 빨리 정해주는 게 걔네들한테도 속 편할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거니와, 하나가타를 더 이상 자극하면 안 된다는 직감을 한순간에 모두가 공유했다.

“…2학년 연습에 참여시키면 무슨 뜻인지 감을 잡겠지. 그럼 다음 달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야.”

다행히 아직 후지마는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문득 제정신이 든 하나가타는 그것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궁금해졌다.


8

“저… 2학년 선배들과 추가로 연습하는 메뉴를 소화하기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퇴부를 해야 하나요?”

2학년 연습에 1학년 후보 몇 명을 참여시킨 지 꼭 1주일째. 예상대로 키타무라의 면담 신청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당연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착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 그렇게 판단했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지. 퇴부에 관한 건…글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럼 나중에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선배.”

부실에 홀로 남은 후지마는 고개를 떨구고 쓴웃음을 삼켰다.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키타무라를 특별히 점찍어둔 것도 아니다. 한 명이라도 남고, 멤버가 정해지면 그뿐이다. 스스로가 ‘기꺼이 남겠다’고 한 사람이어서, 똑같이 한 명이 나타나지 않는 게 억울하기라도 한 것일까. 현 결선에서 카이난에 패배했을 때보다도 마음 한켠이 버겁고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 정도라면 부상 전의 기억이 유독 흐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당장 주전으로 뛰라는 것도 아닌데 부담스럽다는 건가? 부활동을 하면서 정식 경기를 제대로 뛰어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인지? 후지마의 사전에 없는 일을 가지고 연연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무의식적으로 손이 왼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건만, 이 사실을 동급생과 선배들에게 알릴 땐 최대한 건조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애써 담담하게 포장하기일까, 아니면 날것 그대로를 꺼내며 어리광부리기일까.


9

3학년의 ‘비상대책회의’는 상설화된 루틴으로 정착하여, ‘비상’이 아닌 ‘일상’이 되었다. 2학년도 후지마와 하세가와뿐만이 아닌 하나가타까지 더해졌다. 이탈하고 남은 부원 중에는 타카노와 나가노가 합류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라야마와 유즈키는 의견을 내고 교통정리를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후지마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자연스럽게 2학년들의 발언 빈도도 늘었다. 그것은 분명 3학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후지마에게 모든 권한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말을 아끼고 철저히 안배하였음을 눈치챈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지만.

“1학년들 각자 장단점이 있기는 한데…결론적으론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이네.”
“그렇다고 2학년들과의 상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정도인가 하면 잘 모르겠고 말이야. 너희 생각은 어때?”

“피지컬이나 플레이스타일은 뭐…누가 딱히 더 잘 맞고 아니고가 나뉠 수준까진 아닐지도요.”
“다만…그렇다고 한다면, 같이 플레이하는 입장에서 좀 주관적인 인상이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후지마는?”
“…네, 저도 동감해요. 그래서……이왕 같이 할 거라면 좀 더 의욕이 있는 부원으로 하는 것은 어떤가…”

“의욕이라…”

무라야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지마.”

작심한 듯 무겁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입은, 발화자도 미처 해보지 못한 일을 거론해야 하는 부담과 책임감을 고스란히 함께 실었다. 어쩌면 꽤 전부터 준비되었을 법한 내용으로.

“…이를테면 말이야. 우리들, 나나 다른 부원들의 생각을 넌 앞으로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어. 그러니까―이건 일종의 숙제 같은 거야.

여기서 결론을 내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도 있겠지. 혹은 정하기만 하고 공표는 국체 이후로 미뤄둘 수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싶은 말은…네가 1학년 때 기억나?

내가 주장이 되고, 유즈키가 부주장을 맡고, 와다, 카네코, 니시지마도 주전 멤버로 올라오고…모리 감독님이 계실 때 그렇게 추려가던 과정 말이야. 넌 입학하자마자 주전을 꿰차고 우리가 올라가는 과정을 지켜봤지. 뽑히기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던 우리보다는, 네 시각이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지 않겠느냐는 거야. 보고 배운 것, 참고할 것은 어쨌든 모리 감독님밖에 없는 거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

“그리고 동시에, 네가 들어오자마자 스타팅이 된 건 쇼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기 때문에…평범하고 통상적인 과정을 거친 다른 부원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 의견이 달라서 설득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랄까,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거지. 뭔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 이 부분을 항상 유념하는 게 좋아.

기왕 2학년들도 모인 김에 말하자면, 우리가 판단했을 때 일차적으로 하세가와가 그 부분을 보완해주길 바란 것도 있어. 물론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고. 1학년들이 주장인 네 말을 듣지 않을 리는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 2학년들, 특히 경기를 함께 뛸 하세가와, 하나가타, 나가노, 타카노도 네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 것이고―은퇴를 앞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의견이 오갔을 수 있고, 막상 닥쳤을 때 주장의 판단이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 너희도 나나 유즈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따른 적이 있을 거야. 내 말이 실제로 틀렸음이 드러나도 주장인 나를 믿어줬지. 이제부터는 후지마를 그렇게 믿어주는 게 맞다고 봐. 비록 동급생이라고 해도.”

침통해지는 무라야마를 보다 못해 유즈키가 첨언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3학년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어느정도 비통함을 거둘 수 없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모리 감독님이 실수하시더라도 부원들은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았어. 적어도 새 감독님이 오실 때까지는, 모든 상황에서 후지마의 판단이 최우선이 되는 쪽으로…귀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험 면에서나 기량 면에서나, 납득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후지마잖아.

……우리 3학년이 해보지 않은 일을 가지고, 전혀 모르면서 훈수를 둔다거나…주제넘고 온당치 않은 일, 당연히 하고싶지 않았어. 그래, 무게와 책임을 떠넘기고 졸업이라는 탈출구를 향해서 도망가는 짓 말이다.”

시간이 멈춘 양 숨막히는 침묵을 깨고 매듭을 지은 것은 평소 말수가 적던 쿠도였다.

“오늘은 분위기도 그렇고 다들 생각이 복잡할 테니까, 우선 돌아가서 쉬고 다음에 모여서 의견을 나누든 결론을 내든 하자. 무라야마랑 유즈키가 말했듯이, 이제 우리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의사결정도 마찬가지고.”

‘어떤 선택을 하든 네 편이야.’
처음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들처럼 자리를 피해 주는 3학년들은, 후지마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가면서 주문처럼 작게 속삭였다.


10

부실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선택에 골몰하는 일은, 후지마로서도 거의 처음이었다. 굳이 단어를 고르자면 ‘후지마답지 않은’ 모습이다. 무라야마가 너무 많은 말을 해서, 그 많은 단어들이 한 귀로 들어갔다 다른 한 귀로 빠져나와서는 주위를 뱅뱅 돌면서 구름처럼 궤도를 잠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열사병에 걸릴 듯 아직 뜨거운 낮공기에 숨이 턱 막히면서도 한파가 몰아닥친 듯 상체가 움츠러들어, 아무래도 명치가 쥐어짜일 것 같았다. 에이스의 무게 정도는 바람에 가볍게 살랑이는 갈색 머리칼처럼 산뜻하게 이고 살아왔던 후지마에게는 참으로 생경하기 짝이 없었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 생각…

어쩌면 찢어졌던 작은 틈이 문득 중성자별에 준하는 밀도를 가지고서, 블랙홀처럼 모든 질량을 빨아들이고, 중력에 순응하여 더욱 밑바닥으로, 끝없이 가속해나가기 시작한 신호탄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으로 어렴풋이 불길함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1학년들에게는 옮기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낭떠러지에서 후지마를 멈춰세웠다. 선배들이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물론 선배들이 그 경기 때문에 어딘가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것도, 후지마가 보기에 선배들이 그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도 자각은 하고 있다. 그리고 벼락처럼 아무 노트나 꺼내들고 필기구를 손에 쥐었다. 속도와 위치를 확정짓지 못하고 구름처럼 엉킨 채 아무렇게나 공전하는 것들을 어떻게든 지면 위로 끄집어내리기 위해서다. 인간의 관찰과 측정이 본질적으로 포착해낼 수 없다 해도. 관측자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자아라는 필터를 부단히 의심하고자 하는—스스로의 의지와 행위뿐이기에.

- 1학년 각자의 스타일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량은 대동소이함.
- 워크에식을 고려했을 때 이토가 조금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이지만, 지켜보며 의견수렴 필요.
- 부상 등 만약의 변수를 대비하여 조기에 한 명으로 좁히지 않고, 당분간은 현행대로 연습.

후지마는 노트를 덮으며, 폐허처럼 굳게 잠긴 감독실 문을 멀찍이서 한 번 응시했다.

11

잡동사니를 치우고 본모습을 드러낸 부실 구석의 작은 책상은 곧 후지마의 자리가 되었다. 의자를 갖다놓고 골몰하는 나날이 많아지며 캐비닛과 라커룸이 터지기 전에 삐져나온 자료들이 새로 쌓이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는 절연테이프로 책상과 의자 영역을 사각으로 둘러싼 경계선이 그어졌다. 말하자면 그곳이 후지마의 감독실인 것이다. 

모리 감독이 쓰던 원래 감독실은 차마 들어가서 차지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다른 부원들과 너무 분리되거나 군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이런 명목을 내세우지만 사실 단순히 혼자 있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국체를 지나 윈터컵 현 예선이 시작될 때까지도 학교는 새 감독을 선임하지 않았다. 후지마는 상자 안에 갇힌 사람처럼 구석에서 홀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빈도가 잦아져, 부실을 한 폭의 정물화로 묘사한다 해도 자연스럽게 구성요소로 들어갈 법했다.

코트 밖에서 경기를 지휘한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농구로 제법 경력을 쌓아온 후지마로서도 난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동급생에게 명령해야 한다는 것. 주장으로서 말할 때와는 무게가 다르겠지. 이걸 정말로 연습해야 하고 또 실전에서―후지마답지 않게 입술이 바싹 말랐다. 내심 막연히, 정말로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게도 근거없는 낙관에 기대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청소년이 순진한 낙관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언제 가능하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이를 지적해주는 사람이 후지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후지마와 비슷한 처지의 당사자였던 탓으로, 같은 함정에 빠져 있으니 그 부분이 눈에 보일 턱이 없었다. 하물며 바깥에서 관찰하고 ‘감독’하여 바로잡아주려면 어른이어야 가능했거니와, 문제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부재가 초래한 모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거워지는 미간을 알아차렸는지, 불행 중 다행히도 3학년은 가끔씩이나마 후지마를 도우러 찾아왔다. 청백전을 해야하고, 후지마가 감독으로 들어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모두 시험해보아야 했으므로 2학년만으로는 역부족이기도 했다. 노트에 이것저것 끄적여두긴 했지만 어차피 닥쳐봐야 안다. 평소의 후지마라면 그런 다짐만으로 웬만한 부담과 근심을 말끔하게 털어내고 현재의 컨디션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아도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적재 초과의 상황이 먹구름을 드리우고 책상 위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한편 부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부유하는 무수한 흙먼지를 비추어, 밖에서 들어오는 부원들의 시야를 침투했다. 이 장벽을 언제 어떻게 뚫어야 할지, 혹은 그냥 혼자 있게 둬야 좋은지, 처음 맞딱뜨린 난처함에 손을 뻗으려다 만 동급생들의 걱정도 장벽 앞에 모래성처럼 차츰 퇴적되었다.


12

“역시 후지마야.”

3:3 청백전이 끝나자마자 이온음료를 들이킨 히라누마가 시원섭섭한 듯이 말했다. 기록지를 대조해 보던 무라야마와 유즈키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거 말고 뛰면서 느낀 점이라든가… 이 타이밍에 개입해줬으면 좋겠다, 혹은 좀 내비두라는 의견 같은 거 없어?”

아이스브레이킹 치고는 민망한 칭찬이어서 후지마는 괜히 장난스럽게 한 대 쥐어박을 분위기로 받아쳤다.

“음… 20-18에서 하나가타 선배가 덩크를 꽂았을 때 하세가와 선배가 작전타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어디까지나 이쪽 입장에서요. 아, 후지마 선배 팀 얘기만 하는 건가요?”

이토가 쭈뼛거리며 끼어들자 후지마는 버선발로 뛰어나가듯 격하게 환영했다.

“오카다도 한 마디 해봐.”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나가노도 팔꿈치로 툭 치며 거들었다.

“어… 하나가타 선배가 덩크하고 나서 이토의 패스가 조금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는데… 그걸 좀 더 파고들라는 주문이 있었으면 풀어나가기 수월했을 것도 같아요.”
“좋아. 키타무라는 어느 팀도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네. 심판 해주신 니시지마 선배도요.”
“…그냥 단순한 인상인데… 팀으로서는 이토랑 히라누마 선배가 합이 잘 맞았던 것 같고 나머지는 각자 개인기로 경기를 한다는 느낌이에요. 근데 이럴 땐 지시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경기중에 갑자기 손발을 맞출 순 없잖아요.”
“코트에 시야가 넓은 사람이 한 명 있어야지. 보통 포인트가드가 공 배분하면서 그때그때 얘기하고 맞추는 느낌이랄까…”

퇴부를 고민하던 키타무라는 매니저를 맡기로 하면서 연습에는 계속 얼굴을 보이게 되었다. 이윽고 대답인지 뭔지 모를 니시지마의 중얼거림은 곧장 유즈키와 무라야마에게도 전염되었다.

“이토나 오카다가 경기중에 선배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을까?”
“들어야지 뭐 어쩌겠어. 우리도 후지마가 시키는 대로 뛰어다녔잖아.”

경기 내내 하세가와 옆에 붙어 있던 유즈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무라야마도 후지마 뒤에 붙어서 경기와 지시를 지켜봤다. 즉 이는 윈터컵 예선을 위한 자체 청백전이었고, 다시 말해 후지마의 감독 연습을 위한 경기였다. 모처럼 3학년들은 여기에 코멘트를 해주러 온 것이었다. 후지마 쪽에서는 히라누마·오카다·나가노, 하세가와는 이토·하나가타·타카노와 한 팀을 이루는 것으로 정했다.

윈터컵 현 예선의 우승은 언제나 카이난의 차지였다고는 하나, 올해는 대놓고 구경만 할 생각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한편으로는, 거기서라도 후지마가 감독 연습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내년 신학기 전까지는 감독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연초의 신인전은 후지마가 지휘해야 한다. 그래도 그 때만 넘기면, 4월에는 새 감독님이 오실 테니까, 그때까지만 힘내자고 다들 약속했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생각까지 도달하기엔 그들 모두 어린 학생에 불과했다.

“심판 보면서 느끼기론 후지마나 하세가와 둘 다 지시에 별 문제는 없어보였는데. 유즈키랑 무라야마가 어떻게 봤을지.”
“우리 하세가와는 워낙에 과묵하다보니까, 말로 지시하기보단 그냥 나가서 뛰고싶은 모양이던데?”
“후지마는 생각보다 잘해서 좀 놀랐고.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뭘 생각하신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후지마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무라야마는 가볍게 한바탕 웃고서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이어갔다.

“하세가와처럼 들어가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릴 줄 알았지. …농담이고, 후지마를 코트 안에 두고 싶어도 이걸 후지마보다 잘할 사람은 우리 중엔 없는 거 같아서. 후지마가 한 명 더 있으면 좋을 텐데.”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후지마가 한 명 더 있겠냐?”
“다음엔 하세가와랑 하나가타 자리를 바꿔보면 어때? 이번에 또 전교1등이라며.”

무라야마와 쿠도의 실없는 소리에 다들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사이, 멀뚱히 서 있는 하나가타의 눈치를 보며 이토가 작게 속삭였다.

“앗, 하나가타 선배 요즘 슛 연습 엄청 열심히 하시는데…”

사실 하나가타가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 비상한 두뇌라면 뭐라도 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하세가와는 드디어 결심한 듯 손을 들었다.

“저랑 하나가타 자리 바꾸는 거 찬성. 근데 대회 나가서는 하나가타를 코트 밖으로 못 빼지 않을까요.”
“기본적으론 나 없이 뛰어야지.”
“겨울까진 좀 아쉽겠지만 말이야. 당분간은 후지마 없이 경기를 끝내는 게 베스트지. 이도저도 안되면 마지막에 들어가는 정도?”
“그런 경기는 카이난전 정도 아닌가? 료난에 굉장한 녀석이 들어왔다고 듣긴 했지만.”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후지마가 이를 가로챘고, 타카노와 나가노도 화답했다. 단풍처럼 붉은 석양이 깃드는 늦가을이었다.


13

“일찍 왔네.”
“누가 할 소리.”
“료난이 오늘 1회전이라길래, 시합 전에 나와서 뭐 하려나 싶어서.”
“어쩐지 뜬금없이 연습을 쉰다 했다.”
“…역시 그 녀석은 없더라.”
“누구?”
“미츠이 히사시.”
“아. 관뒀을걸 아마.”
“그래? 저 센터는 안 됐네.”

관중석에서 내려다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아카기의 굳은 얼굴이 땅바닥을 뚫을 기세로 제자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허무한 1차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고개 숙인 붉은 유니폼의 학생들 중 한껏 분에 차오른 어깨를 보이는 건 아카기뿐이었다. 늘 그래왔다는 듯이 그 학교의 감독은 경기장에 나오는 것조차 불규칙해서, 명성과 달리 그저 요양을 하고자 아무 학교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거란 풍문이 그저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듯했다. 우리 학교에서 요양하셔도 괜찮은데. 아카기가 눈에 띄는 것은 그저 키와 덩치 탓이 아니라, 그 속에서 혼자만 유달리 시합에 몰입한 사람이었기에—하지만 정말로 유난을 떠는 것은 자신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불현듯 떠올라, 속이 빤히 보일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 하세가와에게조차 본능적으로 넉살 좋은 척을 하고 있었다.

“미츠이가 진짜 관둔 거면, 졸업할 때까지 시합은커녕 관전할 기회도 없겠네.”
“네가 언제부터 미츠이를 의식했다고. 뭐 잘못 먹었냐?”
“넌 아쉽지 않아?”
“?”
“내가 그 때 너였다면 아쉬울 것 같은데. 그래서 일찍 온 게 아니고?”
“뭐래 이 자식이.”
“경기가 오죽 드라마틱했어야 말이지. 아무튼 관둔 거 진짜야? 부상은 나았을 텐데.”
“……겁나 한가하신가봐요 감독님.”
“무슨 일 있었지?”
“미친 별 소릴 다 하네. 올라와도 우리가 100점은 낼 건데 료난 걱정이나 하든가.”

귀신같이 정곡을 찌르는 후지마의 한 마디에 짜증이 끓어올라, 하세가와는 평소와 달리 뇌를 거치지 않고 본심 그대로를 내뱉어버렸다. 그런 비수는 원래 제가 꽂으려던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오늘따라 유독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버럭 성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질 료난의 경기를 위하여 장내에서는 코트 정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사람들이 낮 시간보다 관중석을 좀 더 채우면서 경기장이 약간은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로 변했다. 괴물신인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모양이었다.

료난의 1회전을 보러 온 것은 거구의 센터 우오즈미를 의식해서이기도 했다. 쇼호쿠의 센터도 기본기는 있지만 그는 혼자서 분투했다. 하지만 2미터가 넘는 우오즈미는 타고난 피지컬 자체가 압도적이기도 했거니와 농구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타고난 이점을 살려 하루가 다르게 기량이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경계 대상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괴물 신인이 그와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머지않아 료난은 시드권을 가져가게 될 것이며, 카이난 못지 않은 경쟁자로 부상할 터였다.

이러한 사정을 쇼요의 웬만한 농구부원들은 알고 있을진대, 태연하게도 오늘 연습을 쉰다며 부원들을 해산시켜놓고는 후지마 혼자 조용히 경기를 보러 간 것부터 어딘지 모르게 마뜩치가 않았다. 양키 세계의 스타팅 멤버로 전업한 듯 보이는 미츠이까지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더욱 절친의 손바닥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불쾌하면서도 안도감이 공존하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모순이 맞대결을 펼치는 형태로 하세가와의 침묵 속에 자리잡았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그 시합은 운명의 갈림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센도 아키라.

료난의 시원스런 유니폼을 음절로 바꾸었을 때 정답일 것 같은 이름으로, 신인답지 않은 여유롭고 호쾌한 플레이는 그야말로 호쿠사이의 파도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미츠이 히사시를 놓쳐서 그렇게도 아쉬워하던 타오카 감독의 의기양양한 표정과 함께 코트는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눈에 띄는 신인이 합류했으니 현내 4강이 초장부터 확실시되고 있음을, 관중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연습경기,”
“엉?”
“내가 부탁드려도 받아주시겠지?”
“……”

원래도 진지한 축에 드는 하세가와였으나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삽시간에 흙빛이 된 얼굴은 후지마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후지마가 기억하는 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미츠이에게 패했을 때, 후지마가 쓰러졌을 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나 자아냈을 법한 날것 그대로의 무게였다.

 “…정색하냐? 되든 안 되든 넌 어차피 무조건 같이 갈 거거든.”

후지마가 장난스레 짐짓 토라진 척을 하기 직전에 하세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14


“이토, 속공!”

눈에 불을 켠 후지마는 한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동급생과 후배들의 이름을 연신 호명했다. 앉는 법을 잊은 게 분명했다. 행여 유니폼이라도 평소처럼 입고 있었다면 언제든 무심결에 코트로 뛰어들어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파울 개수와 점수를 기록하던 키타무라는 물을 언제 들이밀어야 좋을지 몰라 내심 발을 동동 굴렀다. 경기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후지마는 1분 정도 골똘히 침묵하더니 오늘은 자신이 들어갈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모두가 긴장으로 입이 바싹 말라버려, 침묵 속에 흔들리는 버스는 그늘 한 점 없는 사막과도 같았다. 초점 잃은 퀭한 눈을 향해—하필이면 유달리 크고 땡그란 눈과 혈색이 옅은 안면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보였겠지만—하나가타는 이따금씩 시선을 주곤 했다. 누가 봐도 뜬눈으로 밤을 지샌 것이 분명했지만, 이런 경기를 앞두고 쉬이 잠들 수 있는 미성년자는 아무래도 세상에 없을 성 싶었다.

상대인 미우라다이 고교를 만만히 봐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부담스러웠다. 후지마가 40분 내내 코트 밖에서 지휘를 해야 한다는 점만 생각하면, 있던 시드권을 반납하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설령 그것이 허락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1회전부터 차근차근 밟아간다고 한들, 끝내 8강조차 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시드권을 버리는 것은 당연히 어불성설이었다. 즉 이른바 ‘후지마 켄지’ 감독의 데뷔전은 얄짤없이 8강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무한 루프 속에서 머리에 쥐가 내릴 것 같았다. 적진을 혼동시키려면 유니폼을 입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겠지만, 중도에 자신을 투입하지 않고 40분 풀타임을 밖에서 지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럴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나머지 연습을 실전처럼 하는 게 아니라 실전을 연습처럼 소모하게 된 것이다. 후지마는 이 점이 대단히 거슬렸다. 그래서 이번 윈터컵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부담없이 하자는 주변의 진심어린 덕담도 좀처럼 위로가 되지 않았다.

“페이크야 타카노, 리바운드해!”
“카즈시 백코트 8번!!”

그나마 제정신인 하나가타도 속이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거기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을 것이 당연하니 차라리 다행이었으나, 버스에서 내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순간 후지마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 불가피했다. 유니폼을 입지 않고 벤치에 앉는 장면을 목격하자마자 온갖 설왕설래가 나돌 것이 벌써 눈에 선하다. 더구나 인터하이에서 부상으로 쓰러진 후 거의 반년 가량을 학교와 집만 오가며 자숙 아닌 자숙의 시간을 보낸 후지마가 아닌가. 오랜만에 나타나서 선수가 아닌 모습을 하고 있으니 겨울방학까지 가십거리로 오르내리기에 이보다 적합한 소재는 없었다.

몇 달 전 졸지에 붙잡혀 무식한 체력훈련의 희생양이 된 하나가타는 이를 갈며 탈주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월등한 신장에 운동신경과 두뇌까지 우수한 하나가타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뻔해서 실소를 참을 수 없었는데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귀에서 피가 날 듯한 선배들의 무한 칭찬에 반쯤 탈진하고 말았다. 새우깡을 향해 날아드는 갈매기와 다를 바 없는 기분도 잠깐 들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기본기가 얼추 구색을 갖추자 곧바로 후지마의 슈팅 전담 과외가 시작되었다. 후지마야 마음이 급했겠지만 솔직히 이건 좀 반칙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소 까다롭지만 폼 나는 슈팅’은 누구라도 도무지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의 깔끔한 슈팅(과 얼굴)을 가까이서 넋놓고 실컷 볼 수 있는 것도, 일대일로 스킬을 전수받는 것도(?) 은근히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의외로 하나가타를 사로잡은 것은 평온한 피드백 뒤에 감춰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절박한 눈빛이었다. 그것이 언뜻 쏜살같이 지나간 순간은 분명 찰나였으되, 착각할 법도 한 짧은 시간에 해석된 감각을 하나가타는 어째서인지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득점하는 센터’가 되어달라는, 그리고 일명 스타의 지분도 좀 나눠서 갖고 있어 달라는… 부주장씩이나 될 생각은 꿈에도,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때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잘했어 하나가타—!”

연골이 닳도록 연마한 페이드어웨이 슛이 산뜻하게 림을 갈랐다.
비록 짜임새는 엉망진창이었고 복기할 것이 산더미였지만, 압도적인 신장을 내세워 쇼요는 무난히 첫 승을 가져갔다. 점수와 승패만 놓고 보면 그랬다.


15


카이난과의 시합은 십여 년 남짓한 인생의 모든 경기 중 후지마의 자존심에 가장 크게 스크래치를 낸 경기였다. 있어야 할 어른이 없는 채로 타카토 감독과 마주 서는 것도, 별 일 아닌 척 마키 신이치의 이글거리는 노안을 능구렁이처럼 피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버겁지만 그렇게 연기하지 않으면 먼저 무너질 것 같은 기분까지도 하나같이 최악이었다. 마음 한켠에서는 얼마쯤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객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악을 쓰는 철부지 같은 본심이, 그런 자신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다.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을 점이라곤 카이난이 현 결선에서 일찌감치 3승을 쓸어담아버려 분을 삭이느라 입술을 깨물던 후지마가 머쓱해진 것뿐이었다. 따라서 카나가와 현 결선의 남은 시합은 세 학교 모두 씁쓸하지만 홀가분한 심경으로 치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카이난과 타케자토의 시합이 종료되었을 때 이 모든 결론에 수반되는 기묘한 안도감을 엉거주춤 품으면서, 차라리 카이난전 당일이 아니라 오늘쯤 타오카 감독과 마주쳐서 인사를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미련을 두고 경기장을 돌아섰다. 결국 발버둥을 치거나 말거나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었다. 가혹한 깨달음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거늘, 현실이라는 녀석은 도통 후지마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하늘이 쇼요를 도운 것은 카이난을 상대로 완전히 탈진한 타케자토를 바로 다음날 만나게 된 이번 일정이 전부였다. 우오즈미와 센도의 손발이 맞아가기 시작하는 료난도 장담할 수 없다. 즉 적어도 타케자토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난번 미우라다이와의 시합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40분을 벤치에서 꽉 채워야만 했다면,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1승을 따내야만 했다. 걱정어린 마음에 최대한 편하게 하라고 누군가 담담하게 어깨를 두드려줄수록 후지마는 서서히 매몰되어 갔다. 쇼요가 현 결선을 전패로 마감한 적도 없거니와, 그 후의 분위기는 꿈에도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어거지 1승이라도 있어야만, 후지마의 발밑이 으스러지지 않고 무시해야 할 말들을 무시할 수 있을 것만 같기에.

메모가 마구잡이로 채워진 노트를 펼쳤다가 짜증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후지마는 긴 한숨을 쉬고 아예 엎어버렸다. 모래바람을 마신 것처럼 텁텁한 소리가 났다. 시합 전날이니 그래도 복기는 해 둬야 하는데 끝도 없이 힘이 빠진다. 그래봤자 내일까지 고칠 수도 없는데 뭐 어쩌라고. 탈력감의 원인을 모른 채 공연히 계절 탓을 해보았다. 운동을 전보다 어쩔 수 없이 덜 하는데도 피로가 몰려와, 순식간에 눈이 감겼다. 후지마치고는 이른 시간이었다.


16

“…파울해 나가노!”

짜증을 낼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후지마의 외침에는 답답함과 다급함이 다소 섞여 있었다. 요 며칠 머리에 구름이 낀 것처럼 불쾌한 짜증스러움이 가시질 않았는데 기어코 시합날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그래서 더더욱 신경질이 날 것만 같았고, 말투가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딴에는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의도대로 말이 나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매니저인 키타무라가 쓴 기록지를 잠시 넘겨받으며 무의식적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다시 코트로 눈을 돌렸을 때, 눈에 띄게 지친 이토가 시야에 들어왔다. 타임을 쓰면서 오카다로 교체하려고 일어서기 전, 일부러 크게 한번 심호흡을 했다.

“이토가 경기를 연속으로 뛰어서 지친 것 같으니까 일단 오카다로 교체하고…”

차분하게 흐름을 짚으려던 후지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원들은 이어질 말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후반 10분까지 충분히 점수 차가 안 나면 내가 들어가는 걸로. 웜업은 전반 끝나고 해놓을 테니까…… 후반전 반환점까지만 버티자고”

타케자토가 결코 만만한 팀은 아니지만, 한껏 예민해진 후지마의 눈에는 모든 것이 지지부진하게만 보였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서도 시합 도중에 종종 나타나는 타케자토의 빈 공간을 어떻게 바늘처럼 파고들어갈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느라, 감독 명찰마저 라커룸에 깜빡 두고 나올 뻔했다. 그 정도로 족쇄를 벗어던지고 코트에 간절히 뛰어들고 싶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본인뿐이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이번 시합이 마지막일 것처럼 뛰었으니까.

“선수교체 부탁드립니다.”

클리닝 타임에 웜업을 하고 저지를 반쯤 어깨에 걸쳐둔 채 후반전을 지켜보던 후지마가 일어섰다. 8분을 남겨두고 12점 차.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방심하다 뒤통수를 맞고 싶지 않았고, 납작하게 눌러야만 속이 개운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우선은 뛰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하이를 기억하던 사람들이 관중석에서 웅성거렸다. 그런 것쯤은 이미 들리지 않았지만.

코트에 들어가고서 처음엔 설렁설렁 공을 돌렸다. 한두 번쯤 탐색전 삼아 공수를 주고받은 뒤,  타카노에게서 공을 받은 후지마가 번개처럼 내리꽂듯이 반대편 코트를 향해 내달렸다. 황급히 따라갔으나 이미 슛은 림을 통과한 후였다. 골밑 수비를 위해 타케자토의 선수들이 점차 옹기종기 모이자 기다렸다는 듯 위치를 바꿔 거침없이 3점을 쏘아댔다.

애초에 전술이랄 것 자체가 없었다. 그저 공이 오면 후지마에게 주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까지의 침착하고 신사적인 플레이와는 다르게 불협화음을 내며 코트를 침습해온 무자비한 원맨쇼의 시작은, 일시정지 버튼이 눌려 있던 인터하이 경기를 다시 재생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처럼 독단적으로 시합을 끌고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농구 좀 봤다는 사람들은 어련히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미 벤치를 본 사람들은 흡사 분풀이와도 같은 막무가내식 플레이를 눈앞에서 보고도 차마 탓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매니저와 곁에 있던 학생들 역시 응원은커녕 눈만 쫓아가기에도 바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집중하면서,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들마냥 간절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것이 그토록 전도유망해 보이던 후지마 켄지의, 금년도 윈터컵 현 예선 첫 출장 경기가 되었다.
또한 마지막 경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도, 모두가 알듯이.
어쩌면 이번 윈터컵만이 아니라……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피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겨를조차 없이 8분을 40분처럼 뛰게 할 수 있었던 것은—애석하게도 낭만적인 단어들이기만 할 수는 없었다.


버저가 언제 울렸는지, 몇 점 차로 끝냈는지, 인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새까맣게 그을려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특정 날짜의 특정 시각. 시합이 끝나고 후지마 곁에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여전히 장작불처럼 타오르는 불길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코트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대체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우르르 퇴장하고 열기가 식어가는 동안 우두커니 남아서,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눈치챈 것은.

그제서야 불현듯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들을 이렇게 남겨두면 안 되는데.
코트 안에서도 그래야 했는데.

정적 속에서 입을 뗄 자신이 없어진다.

“오늘 수고했고……”

뻔한 말을 뻔뻔하게 하는 자신에게 어쩐지 질릴 것 같아서 왼쪽 관자놀이가 윙윙 어지럽게 울린다. 갑자기 격하게 뛰어서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체력이 모자란 탓은 아니다. 복기를, 설명을, 사과를……너무 많은 단어가 고개 숙인 머리통에서 쏟아져나와 코트 위의 라인을, 빈 노트의 줄을, 숨이 막히도록 빽빽하게 채워버려 무엇을 먼저 주워담아야 할지 한순간에 엉키고 말았다.

“…후지마 선배…?”

동공의 초점이 흐려진 채 멈춰버린 컴퓨터 화면처럼, 태엽이 풀리고 건전지가 닳은 인형처럼 말을 하다 말고서, 다음 단어를 찾아 잇지 못하는 낯선 후지마는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불길함을 감지한 동급생들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후지마, 하고 누군가 낮게 읊조리자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서둘러 수습했다.

“시합 금방 또 있으니까, 컨디션 관리 잘 하도록. 이상.”

이 계절에 열사병이 올 리도 없는데 희한하게도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1학년을 먼저 집에 보낸 뒤 주전들을 샤워실로 앞세우고 후지마는 마지막으로 라커룸에 들어갔다. 혹여 잘못 건드릴까 싶어 후지마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던 2학년들은, 얼마간 눈빛을 주고받다 한꺼번에 라커룸으로 쳐들어갔다. 초록색 저지가 커다란 더플백 위에 엎어져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진 후지마를 냅다 들고 뛰느라 쇼요의 금년 윈터컵은 싱겁고도 요란하게 막을 내렸다.



CREDIT

Die Sonate vom Guten Menschen
- Das Leben der Anderen(2006)

모리, 무라야마, 유즈키
- 도도(https://www.postype.com/@kenkenn-syo), ‘흔들다리에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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