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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것은 내 논문의 정확성을 통렬하게 증명해 줍니다.

다음은 지난 4월 1일 저희 집에 도착한 구독 전문 월간지 테미스에 연재된 다카야마 마사유키의 칼럼입니다.
이 글은 그가 전후 세계에서 독보적인 저널리스트임을 증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가 노벨 문학상을 가장 받을 자격이 있는 작가라는 제 논지의 정확성을 신랄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페루의 전 대통령 후지모리는 백인들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는 경제와 안보를 개선했지만 미국 인권 단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명문 가문이 모든 것을 책임졌습니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마침내 감옥에서 나와 병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85세입니다. 
산소 흡입기를 끼고 차창 밖으로 지지자들에게 손을 살짝 흔드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딸 케이코의 보살핌 아래 보낼 예정이지만,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그의 가석방을 반대하며 별도의 소송을 통해 그를 살인죄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인권 단체가 말하는 '인권'은 권위적인 백인입니다. 
그들은 유색인종이 백인의 권위를 침해했기 때문에 그를 처벌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후지모리에게 인권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후지모리를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 그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을 때였습니다. 
페루는 벨룬데 가문과 프라도 가문 등 스페인계 가문인 시엔 파밀리아(100개의 파밀리아)가 통치해 왔습니다. 이 가문은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 방식은 옛 식민지 시절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항상 시민들의 안보와 교육을 무시하고 백인들의 이익만을 보장했습니다. 
그 결과 물가상승률은 1,000%를 넘었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졌으며 국가 경제는 무너졌습니다. 
아무도 제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도적질은 만연했으며, 경찰은 부패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혼란의 온상이었습니다.
아비마엘 구즈만은 마오쩌둥의 모범을 따라 마을과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하는 살인단 '센데로 루미노소'를 만들어 한때 페루의 3분의 1을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후지모리는 페루를 재건하기 위해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양원제 의회는 '백인 가문'의 백인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정부 청사도 이 가문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 점령하여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센데로는 또한 후지모리에 대한 복수를 위해 리마 교외에 있는 JICA 시설을 공격하여 일본인 직원 3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신병 훈련이라며 치명적이지 않은 신체 부위에 총을 쏘게 했고, 마침내 여성 지휘관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후지모리는 페루의 개혁을 위해 '대통령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상하원을 폐쇄한 후 자신이 구상했던 국가 정치 개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먼저 그는 "백가쟁명"이 지배하는 상원과 하원을 개혁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존재 이유가 없는 상원(정족수 62명)을 폐지하고 단원제 입법부로 대체했습니다. 
남은 하원의 정족수는 180명이었지만 이 역시 120석으로 줄었습니다. 
후지모리는 또한 스스로 지원하던 경비도 대폭 삭감했습니다. 
또한 은퇴 후 연금 수령을 위해 5,000달러를 자비로 충당했습니다.
이는 국민 평균 소득의 5배가 넘는 금액입니다. 
후지모리는 이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각 부처는 '백가쟁명' 제도를 통해 채용을 해왔지만 후지모리는 시험 제도로 전환했습니다. 
예를 들어 연고주의로 인해 문부성 직원 수가 3,700명까지 늘어났지만 후지모리는 채용을 재검토하여 500명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해고했습니다. 

성장은 긍정적이고 부패는 감소했습니다. 
페루에는 8,000개의 의무학교가 부족했지만 후지모리는 해고로 절감한 인건비를 학교를 새로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후지모리는 "주말마다 새 학교 개교 축하 행사가 열리는데, 저는 헬리콥터를 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후지모리가 나타나기 전 경찰관은 원하는 만큼 차를 세우고 교통법규 위반을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경찰관에게 "절반만 내면 풀어주겠다"며 뇌물을 강요했습니다.
후지모리는 경찰관들에게 이름표를 달게 하고 뇌물을 갈취한 경찰관들을 고발했습니다. 
부패는 즉시 멈췄습니다. 
그는 센데로 루미노소에 공안 경찰을 배치했습니다. 
후지모리는 공안 경찰에게 <오니헤이 한카초>에 언급된 '방화, 절도, 도박을 담당하는 경찰'과 유사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6개월 만에 구즈만 등은 리마의 한 저택에 숨어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센데로는 1969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오주의 수법을 따라 외딴 마을을 습격하여 촌장과 그의 가족을 살해하고 마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후 혁명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는 또한 코카인 거래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3만 명을 살해하고 2,000명의 젊은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하여 차세대 혁명 전사를 양성했습니다. 
후지모리는 구즈만을 철창에 가두고 트럭 뒤에 태워 리마 시내를 끌고 다니며 감옥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결과 센데로가 무너지고 인플레이션이 10%로 개선되었으며 경제 성장이 플러스로 돌아섰고 부패가 감소했습니다. 
후지모리는 첫 임기 동안 '씨엔 파밀리아의 식민지'였던 페루를 정상적이고 정상적인 국가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호평은 좋지 않았습니다.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의 마이클 쉬프터 교수는 "후지모리는 페루에 뿌리내린 민주주의의 뿌리를 파괴했다"며 후지모리를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시프터 교수는 비민주적인 쿠데타 방법을 비난하면서도 백인을 나쁘게 보이게 만든 것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미국도 후지모리를 '군사 정권'(JUNTA)이라고 부르며 경멸의 뜻을 담아 미주기구에서 추방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5년 대선이 치러졌고, 미국은 드퀘일 전 유엔 사무총장과 백인 정권의 복원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후지모리가 재선되었고 페루 경제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후지모리는 과감하게 3선에 도전해 페루를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영국 잡지는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결정적인 표차로 살얼음판에서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페루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가혹한 대우가 강화되었습니다.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제목으로 백인 후보의 귀환을 옹호했습니다.
후지모리의 "방화, 절도, 도박 혐의로 복역"은 미국 인권 단체로부터 "후지모리가 살인자라는 증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후지모리는 일본으로 탈출한 후 칠레에서 구금되었다가 페루로 인도되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무시되고 지금은 미국 인권 단체의 "그를 감옥에 넣어야 한다"는 말만 크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백인은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일본은 지난 전쟁에서 식민지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보복으로 그들은 일본을 철저히 파괴하고 일본의 존재도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후지모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4/4/1 in Ky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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